다산을 찾아서
다산과 기예
기예
수원성
- 정조의 수원화성 행차시 배다리를 제작하고,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 화성을 축조.
마과회통
- 마과회통은 마진(麻疹:홍역)의 분과를 다룬 의학서.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
- 카메라 옵스큐라 (Camera Obscura)란 오늘날 카메라의 어원.
<칠실관화설 (漆室觀畫說)> 이란 글에 따르면, 다산은 어두운 방 안에 앉아 문에 뚫은 바늘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벽면에 비치도록 하여 바깥 경치를 감상했음.
다산과 차[다병茶餠, 떡차]
-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유배지 강진에서 18년을 보냈다. 다산(茶山)이란 호는 그가 10년간 거주했던 초당의 뒷산 백련사(白蓮社) 석름봉에 차나무가 많아 ‘다아산(茶兒山)’이라 불린 것에서 유래하며, 그가 강진에 머무는 동안 즐겨 사용하였다. 다산은 유배 전부터 차를 마셨고 차에 대한 지식이 매우 깊었던 것으로 보이며, 강진에서는 본격적으로 차를 제조해서 마시기 시작하였다.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다산의 떡차를 ‘만불차(萬佛茶)’라 이름 짓고, 영남의 죽로차(竹露茶), 밀양의 밀성차(密城茶)와 함께 조선의 명차로 꼽았다.
다산은 다산 초당에 정착하면서부터 봄이 되면 차를 만들 도구를 미리 준비하고, 제자들에게 시키거나 손수 찻잎을 따서 겨울까지 마실 차를 만들어 비축하였다. 이렇게 차를 즐겼던 습관은 강진에서 뿐만이 아니라 고향 마재(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로 돌아와서도 지속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무렵 18명의 제자들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다회(茶會)라 할 수 있을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강진에서 보내 온 곡우에 딴 잎차 1근, 입하의 늦은 찻잎으로 만든 떡차 2근으로 차 생활을 이어갔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죽기 6년 전(1830), 강진 시절 막내 제자인 이대아(李大雅, 李時憲), 1803~1860)에게 보낸 편지에, “지난 몇 년 동안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쇠잔한 몸뚱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다병(茶餠) 뿐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다산에게 차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취향 이상의 음료로서,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이유로 차를 마셨던 것이다.
다산이 좋아했던 차 종류는 은은한 향이 감도는, 위에 자극이 적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차, 다병(茶餠, 떡차)이었다. 그는 찻잎을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서(三蒸三曬) 곱게 갈았고, 마시기 좋도록 최대한 곱게 갈기를 원했다. 그리고 석천(石泉)수와 잘 섞어 반죽하여 작은 떡 모양을 만들어 햇볕에 잘 말렸다. 잘 말려진 작은 다병들이 바람이 잘 통하는 망태기에 넣어져 초당의 벽에 매달려 있을 풍경이, 저술에 몰두하며 간간히 다병을 우려 정신을 일깨웠을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다산초당에서 백년사까지는 다산이 늘 산책하며 사색하던 길이 이어져 있다. 그 곳의 혜장(惠丈) 스님은 다산이 차를 만드는 데 큰 관심을 보였고 다산에게 유학을 배우기도 했다. 또한 대흥사의 젊은 초의(草衣, 1786~1866) 스님도 차에 관심을 갖고 초당을 드나들었다. 다산은 보림사(寶林寺)의 버려진 차밭을 안타깝게 여기며 스님들에게 차를 만들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이 세 다인들은 남도의 버려진 차밭을 일구고 조선차를 부활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丁學淵)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초의 등과 교류하며 조선 선비의 차 문화를 이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