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강의보 中庸講義補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가 내린 ≪중용(中庸)≫의 의문(疑問)에 대해 정약용이 답변하고 보완한 저술.

≪중용강의보≫는 정약용이 정조의 ≪중용≫에 대한 70조목(<중용의문(中庸疑問)>)의 질문에 답해 올렸던 원고를 유배 기간 중 수정 보완하여 완성한 저술이다. ≪중용자잠(中庸自箴)≫과 함께 ≪중용≫에 대한 정약용의 독창적 해석이 잘 나타나 있다.

정약용은 22세(1783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진학하였는데 그 이듬해인 1784년(甲辰)에 정조가 ≪중용≫ 가운데 의문나는 내용 70조목을 태학생들에게 대답하게 하였다. 이에 정약용은 이벽(李壁, 1754~1786, 호:曠菴)과 더불어 주어진 문제를 함께 토론하고 상의하여 답을 작성하여 올렸다. 정약용이 올린 답변을 살펴보고 정조는 “정약용이 누구냐? 그의 학문이 어떠냐? 다른 성균관 유생의 답은 대개 거친데 홀로 정약용의 대답만이 독특하다. 그는 반드시 학식이 있는 선비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 1793년 정약용은 이 답변서를 다시 정리하면서 자신의 대답이 견강부회하여 본지에 어긋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강진(康津)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1814년에 ≪중용자잠≫을 완성한 후 이어서 1784년에 씌여진 옛 원고를 보완하였다. 이 때 정조가 질문하지 않은 문제이지만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에 대해 논의를 보태어 총 6권으로 증보된 ≪중용강의보≫를 완성하였다. (≪중용강의보≫ 권1, <서(序)>)

활자본은 1936년에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 제2집, 경집 제4권에 수록되어 있다. ≪중용강의보≫ 끝부분에는 ≪희정당중용강의(熙政堂中庸講義)≫가 붙어 있다. 이것은 정약용이 29세 때에 희정당에서 정조를 비롯해 내각제신 이병모(李秉模, 1742~1806), 오재순(吳載純, 1727~1792)이 ≪중용≫에 대해 묻고 정약용이 답변한 것으로 12문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용강의보≫의 구성은 1784년(23세)에 쓴 초고와 1814년에 수정 보완한 부분이 합쳐져 있다. 정약용은 20대에 쓴 초고에는 “신이 대답하여 아룁니다.[臣對曰.]”라고 하고, 중간 중간에 “지금 생각해보건대[今案]“라고 하여 50대의 생각을 새롭게 더했다. 더불어 초고 작성 시 이벽에게 도움을 받은 사실도 기록하였다. 이처럼 ≪중용강의보≫에는 23세에 쓴 내용과 53세에 수정 증보한 내용이 합쳐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분석하면 정약용의 사상이 전기와 후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비교하여 파악할 수 있다. 대체로 갑진본 초고의 내용에서도 주희(朱熹, 1130~1200, 호:晦庵)의 의견과 다른 부분이 많이 있지만 표현이 보다 신중했다. 그러나 53세에 보완한 부분을 보면 주희의 중용설을 더욱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학설을 한층 확신에 찬 태도로 피력하였다.

≪중용≫ 수장(首章)에 대한 입장

주희는 ≪중용≫ 수장(首章), “하늘이 명한 것[天命]을 본성[性]이라고 하며 본성을 좇는 것[率性]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修道]을 가르침[敎]이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를 해석하면서, ‘본성을 거느린다’ 혹은 ‘본성을 좇는다’로 번역될 수 있는‘솔성(率性)’의 ‘솔(率)’을 ‘순(循: 좇는다, 따른다)’으로, ‘도를 닦는다’로 번역되는 ‘수도(修道)’의 ‘수(修)’를 ‘품절지(品節之: 등급과 항목을 정하다)’로 해석하였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주희의 해석은 “수위(修爲: 인위적 수양 노력)” 의 의미를 잘 드러내지 못한다고 보았다. 정약용은 주희가 ≪중용≫의 ‘명(命)’과 ‘성(性)’과 ‘도(道)’에 대해서 말하면서 ‘인(人)’ㆍ‘물(物)’ 즉 사람과 동물을 겸하여 언급하기 때문에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비해 정약용은 ‘천명지성(天命之性)’은 인성(人性)을, ‘솔성지도’는 인도(人道)를, ‘수도지교’는 인교(人敎)를 가리킨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솔성의 ‘솔(率)’과 수도의 ‘수(修)’에는 윤리적 실천의 노력, 즉 ‘수위(修爲)’의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귀신(鬼神)” 개념에 대한 입장

≪중용강의보≫는 중용의 해석에 있어서 귀신의 존재를 매우 중시했다. 정약용은 중용의 덕은 ‘신독(愼獨)’이 아니면 이룰 수 없고 신독의 공부는 귀신이 아니면 두려워 할 바가 없으므로 귀신의 덕은 우리 도가 근본으로 하는 바라고 주장했다. ‘부도불문(不睹不聞)’은 다른 사람이 나를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귀신이 (인간을) 지켜보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외에도 ‘막현호미(莫顯乎微)’, ‘비이은(費而隱)’을 모두 귀신의 존재와 관련시켜 해석하고, 귀신의 존재가 항상 인간을 내려보고 있으므로 동(動)ㆍ정(靜)을 막론하고 계신공구(戒愼恐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정약용의 ≪중용≫해석에서는 귀신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면 귀신과 상제는 어떤 관계인가? 상제의 존재는 형상이 없다는 점에서 귀신과 성질이 같다. 그러므로 상제를 귀신이라고 칭하기도 한다고 설명하였다. 상제나 귀신은 모두 형상은 없으나 인격적 특성을 지녔다. 정약용의 이러한 인격적 귀신관은, 귀신을 ‘음양 이기(二氣)의 양능(良能)’으로 보면서 합리적인 설명으로 귀신의 의미를 축소하는 성리학자들의 견해와 크게 대조되었다.

“인심도심(人心道心)”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입장

인심도심과 사단칠정에 관한 정조의 질문에 대해서는, 20대의 정약용은 이이(李珥, 1536~1584)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기(氣)는 독립적 존재인 ‘자유지물(自有之物: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고, 리(理)는 의지해서 존재하는 ‘의부지품(依附之品: 기대어 붙어있는 것)’이므로 리는 반드시 기에 의지한다고 이해했다. 그러므로 ‘기가 발하고 리가 거기에 탄다.[氣發而理乘之.]‘는 타당하나 ‘리가 발하고 기가 그것에 따른다.[理發而氣隨之.]‘는 불가하다고 보았다. 리는 먼저 발할 수가 없고 기가 먼저 발하므로 발하는 것은 기이고, 발하는 근거[所以]는 리라는 이이(李耳)의 학설이 타당하다고 청년 정약용은 설명했다. 사단과 칠정은 둘로 나눌 수 없고 모두 기가 발하고 리가 타는 ‘기발이리승지’에 해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사단칠정에 대한 자기 학설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1801년에 <이발기발변(理發氣發辨)>을 지어서 입장을 수정하였다. 정약용은 ≪중용강의보≫에서 초고를 보완하면서 주희와 정자(程子)의 중용해석에 많은 비판을 가했다. 정자가 성인의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에 비유하고, 주희가 성인의 마음이 미발(未發)에는 수경(水鏡)의 체(體)가 되고 이발(已發)에서는 수경의 용(用)이 된다고 하는 설명에 대해서, 정약용은 ‘명경지수’라는 비유는 불교에서 유래한다고 지적했다. 정약용은 정주(程朱)의 심성론(心性論)과 수양론에 스며들어 있는 불교의 영향을 분석하고 강하게 비판했다. 미발이란 심지사려(心知思慮) 자체가 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의 감정이 발하지 않은 것을 가리킬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용(庸)” 개념의 해석 그 외에도 주희가 ‘용(庸)‘을 ‘평상의 리(理)’라고 해석하는 것을 부정하고, ‘용’을 ‘항상(恒常)’, ‘경상(經常)’으로 풀이하였다. ≪중용≫의 ‘용’을 평상의 이치로 해석하는 것은, 불교의 ≪지월록(指月錄)≫에서 조주(趙州, 778~897)화상이 남천(南泉, 748∼834)에게 도를 물었을 때 남천이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한 것에서 유래하였을 뿐, 유교의 옛 경전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고 했다.
≪중용≫에 나오는 “용덕지행(庸德之行)”ㆍ“용덕지근(庸言之謹)” 그리고 ≪주역(周易)≫에 나오는 “용언지신(庸言之信)”ㆍ“용행지근(庸行之謹)”에서 용언은 ‘항언(恒言)‘을, 용덕은 ‘항덕(恒德)', 용행은 ‘항행(恒行)‘을 가리키는 용례를 들어서 중용의 용은 평상이 아니라, ‘항상(恒常)', ‘경상(經常)‘의 뜻이라고 정약용은 해석했다.

이벽의 영향 정약용은 1784년 ≪중용강의≫를 작성할 때 이벽과 상의하였으며, 이 때 이벽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적지 않았다. 이벽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부분에 대해서는 이것을 사실대로 밝혔다. 이벽은 당시에 천주교에 몰두하였기 때문에 신학적 관점에서 ≪중용≫을 이해하였는데, 정약용에게 어느 정도 이러한 영향이 있었던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갑진본 ≪중용강의≫를 수정 보완하여 ≪중용강의보≫를 완성할 무렵 정약용은 53세로서 성숙한 학문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독자적 학설을 자유롭게 개진하였다. 그는 특히 주희의 ≪중용장구≫에 내재하는 불교적 요소를 강하게 지적하기도 했다.

≪중용강의보≫에는 정약용의 초년기 사상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중장년 이후의 사상으로 이어지고 있거나 심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유학과 서학의 만남으로 인해 이루어진 창조적 경학 해석의 좋은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중용≫에 대한 정조의 질문을 통해 정조의 학문적 식견과 관심을 파악할 수 있다.

(장승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