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고훈 尙書古訓

정약용이 현존하는 ≪상서(尙書)≫ 중 금문(今文) 28편의 주석을 집성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한 책.

1810년대에 작성된 ≪상서고훈≫ 6권과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7권을 합쳐서 1834년에 21권 7책으로 재정리했다.
1810년 가을에 작성된 ≪상서고훈≫ 초고본은 ‘고훈수략(古訓蒐略)’이라고도 하는데, ≪상서정의(尙書正義)≫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에 수록된 한(漢) 대 학자들의 주석들을 선별하고, ≪사기(史記)≫⋅≪설문(說文)≫ 등에 인용된 ≪상서≫의 일문(逸文)들을 채록하여 정리하였다. ≪상서고훈≫의 매권 권두(卷頭)에는 “열수 정약용이 엮었으며 문인 이청이 모았다.[冽水丁鏞編, 門人李𤲟輯.]”라고 기록하여 이청(李𤲟 = 李鶴來, 1792~1861, 호:靑田)이 자료 정리를 주로 담당하였음을 밝혔고, 권말에는 <일편제서(逸篇諸序)>를 수록하였다. 1811년 봄에 작성된 ≪상서지원록≫ 초고본은 금문 28편의 원문에서 표제어를 뽑고, 매색(梅賾 = 梅頤, 枚賾, ?~?, 동진 시기 활동)과 채침(蔡沈, 1167~1230)의 주석을 ≪상서고훈≫ 초고본에서 정리한 한 대 학자들의 주석과 비교하며, 송(宋) 대 이후 학자들의 설을 참고하면서 정약용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지원’이란 책 이름은 ‘소통하여 옛 일을 아는 것이 ≪상서≫의 가르침이라.[疏通知遠 書敎也.]’는 ≪예기(禮記)≫의 문구에서 나왔다.
1818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김매순(金邁淳, 1776~1840, 호:臺山), 신작(申綽, 1760~1828, 호:石泉)과 교류하고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상서보전(尙書補傳)≫과 염약거(閻若璩, 1636~1704)의 ≪고문상서소증≫을 열람했다. 이를 통해 정약용은 자신의 ≪상서≫ 연구에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수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는데, 이는 조목별로 해설한 ≪상서지원록≫의 본문을 해체하여 ≪상서고훈≫의 해당 부분에 일일이 끼워 넣고 근거가 없거나 사리에 어긋난 표현을 삭제하는 작업이었다. ≪상서고훈≫의 권말(卷末)에는 정약용이 작성한 발문이 있는데, ‘≪상서고훈≫ 21권 7책은 자신이 편집하고 베낀 책으로, 1834년 2월 2일에 작업을 시작하여 6월 10일에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상서고훈≫의 원본은 21권 7책이었지만, ≪여유당전서≫에는 경집 제21권부터 제28권까지 총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유당전서≫는 필사본 3권 1책을 1권으로 조정한 것이 일반적이므로, ≪상서고훈≫의 권수(卷首) 부분이 1권이 되고, 본문 21권이 7권으로 조정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의 ≪정본(定本) 여유당전서≫(2012)에서는 ≪상서고훈≫이 총 2책으로 출간되었다.

≪여유당전서≫의 권별 체제를 따라 그 내용을 소개한다.
<권수(卷首)>에는 <상서고훈서례(尙書古訓序例)>, <상서고훈범례(尙書古訓凡例)>, <상서서(尙書序)>가 있다.
<서례>에는 <고훈수략서설(古訓蒐略序說)>, <상서지원록서설(尙書知遠錄序說)>, <상서고훈지원록합편서설(尙書古訓知遠錄合編序說)>이 있는데, 이는 ≪상서고훈≫의 초고본, ≪상서지원록≫의 초고본, ≪상서고훈≫과 ≪상서지원록≫을 합할 때에 작성했던 서문을 모은 것이다.
<범례>는 총 8조로 구성되는데, 서문과 본문의 체제는 정현(鄭玄, 127~200, 자:康成)의 설을 따르지만 원문은 매색이 정한 것을 따르며, 서술 방식에서 ‘고이(考異)’는 글자가 다른 것, ‘고오(考誤)’는 뜻이 틀린 것, ‘고증(考證)’은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것, ‘고정(考訂)’은 평순하게 서로 의논한 것, ‘고변(考辨)’은 서로 논란을 벌인 것, ‘논왈(論曰)’과 ‘정왈(訂曰)’은 다른 견해를 드러낸 것, ‘연의(衍義)’는 경전의 본래 뜻과 상관없이 부연 설명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상서고훈≫의 초고본에서는 고정(考訂)ㆍ인증(引證)만을 구분했는데, 말년에 와서 분석 방법이 더욱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
<상서서>는 ≪상서≫ 100편의 서문을 말하는데, 정약용은 매색본에 있는 <서서(書序)>가 비록 공자(孔子 = 丘, 기원전 551 ~ 기원전 479, 자:仲尼)가 작성한 원본은 아니지만 옛 것을 보존하기 위해 정리하며, 그 순서는 ≪상서정의≫에 나오는 정현의 설을 따른다고 했다. 정약용은 ≪상서≫ 100편을 <우하서(虞夏書)> 20편, <상서(商書)> 40편, <주서(周書)> 4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본문의 권별 구성을 보면,

제1권: <요전(堯典)>,
제2권: <순전(舜典)>, <고요모(皐陶謨)>,
제3권: <우공(禹貢)>, <감서(甘誓)>,
제4권: <탕서(湯誓)>, <반경(盤庚)> 상ㆍ중ㆍ하, <고종융일(高宗肜日)>, <서백감려(西伯戡黎)>, <미자(微子)>, <목서(牧誓)>, <홍범(洪範)>, <금등(金縢)>,
제5권: <대고(大誥)>, <강고(康誥)>, <주고(酒誥)>, <재재(梓材)>, <소고(召誥)>,
제6권: <낙고(洛誥)>, <다사(多士)>, <무일(無逸)>, <군석(君奭)>, <다방(多方)>, <입정(立政)>,
제7권: <고명(誥命)>, <강왕지고(康王之誥)>, <비서(費誓)>, <여형(呂刑)>, <문후지명(文侯之命)>, <진서(秦誓)>가 있고,
그리고 권말(卷末)에 <발(跋)>이 있다.
정약용은 100편의 서문을 분석하면서 현존하는 <순전(舜典)>은 원래 <요전(堯典)>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며, <익직(益稷)>은 원래 <고요모>의 후반부인데 매색이 고의로 편을 분리시킨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상서고훈≫에서 <순전>은 <요전>에, <익직>은 <고요모>에 포함시켜 관련 내용을 정리했다.
≪상서고훈≫은 정약용 만년의 저작이기 때문에 그의 경학 연구 방법론이 가장 발달된 형태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매씨서평(梅氏書平)≫과 마찬가지로 한 대에서 청 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학자들의 주석과 ≪상서≫ 원문의 내용과 관련이 있는 자료들이 다양하게 인용되었으며, 모기령(毛奇齡, 1623~1716, 호:西河)과 염약거의 주석도 다수 인용되었다. 또한 주요한 논점에서는 도설이나 표를 활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했는데, <홍범구주도(洪範九疇圖)>는 홍범의 구주를 정전형(井田形)으로 만들고 중앙의 공전(公田) 자리에 황극(皇極)을 배치한 그림으로, 구주를 이렇게 배치해야 서로 대응하고 관계되는 묘한 이치가 잘 드러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오행전제설종횡표(五行傳諸說從橫表)>나 <거동동정제설종횡표(居東東征諸說從橫表)>는 학자들의 주장이 다른 경우에 이를 표로 정리하여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정약용은 ≪상서지원록≫의 서문에서 ‘≪상서≫를 연구하는 것은 옛 제왕의 사적을 알아 현재에 맞게 시행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실제로 그의 경학 연구는 경세학(經世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특히 ≪상서고훈≫에는 경세학에 관한 관심이 잘 나타난다. 정약용은 ≪상서≫, <고요모>를 해석하면서 생민(生民)들의 욕구에는 ‘부자가 되려는 욕구’와 ‘관리가 되려는 욕구’가 있는데, 이를 해결하려면 관리의 선발을 공정히 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정약용의 경세학은 경학 연구를 통해 관리의 선발을 공정히 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었던 옛 제도를 밝히고, 이를 현실에 맞게 응용한 제도를 만들어 내면 되는 것이었다. ≪상서고훈≫에서 이와 관련된 것으로는 관리들의 실적을 평가하는 “고적제(考績制)” 와 교육 및 군사 제도의 근간이 되는 “육향제(六鄕制)” 논의를 꼽을 수 있다.
정약용은 요(堯)ㆍ순(舜)이 관리의 선발과 “고적(考績)” , “형옥(刑獄)” 과 같은 국사를 직접 처리하느라 잠시의 여가도 없었음을 강조하였으며, 황극(皇極)을 재해석하여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군주의 권한 역시 강조했다. 또한 그는 요ㆍ순의 치적 가운데 ‘고적’ 이 가장 중요한데, 고적에는 대상자가 인사권자에게 자신의 공적을 미리 보고하는 주적(奏績)과 인사권자가 3년마다 한 번씩 대상자가 보고한 내용을 실제의 치적과 비교하여 평가하는 ‘고적’ 이 있으며, 9년 동안 세 번의 고적을 한 이후에 인사이동을 실시한 것으로 보았다.
정약용은 주(周) 대의 제도인 “육향(六鄕)” 과 “육수(六遂)” 의 위치에 대해 정현과 견해가 달랐다. 정현은 육향은 왕성(王城)에서 100리 지역에 위치하고, 육수는 왕성에서 100리 내지 200리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는데, 정약용은 육향은 왕성의 안에 있고, 육수는 왕성에서 50리 떨어진 근교(近郊) 지역 안에 위치한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되면 왕성 및 근교 지역의 인구 집중도가 매우 높아지는데, 정약용은 이곳에 과거 및 군사 제도를 집중시킴으로써 왕성 및 근교 지역을 중시했다. 이러한 정약용의 해석은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인구가 급증하던 18세기 수도권 지역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이 ≪상서고훈≫에서 제시한 고적제와 육향제에 대한 견해는 ≪경세유표(經世遺表)≫의 제도 개혁안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유배기에 ≪상서고훈≫을 비롯한 경학 연구를 통해 발견한 옛 제도의 장점이 ≪흠흠신서≫ㆍ≪목민심서(牧民心書)≫ㆍ≪경세유표≫와 같은 경세학 저술에 반영되고, 경세학 저술에서 정리된 견해가 다시 경학 연구서인 ≪상서고훈≫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상서고훈≫은 정약용이 말년에 가졌던 경학 및 경세학적 지식이 종합적으로 반영된 책이라 할 수 있다.

(김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