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 牧民心書

정약용이 부사(府使), 목사(牧使), 군수(郡守) 및 현령(縣令) 등 수령(守令)들이 군현(郡縣)을 통치할 때 가져야 할 몸가짐, 애민정신과 업무처리 지침을 육전(六典)체제로 자세히 제시한 목민서.

부임(赴任)에서 해임(解任)에 이르기까지 수령들이 지녀야 할 청렴한 몸가짐, 애민정신과 주재(主宰)해야 할 이방(吏房)ㆍ호방(戶房)ㆍ예방(禮房)ㆍ병방(兵房)ㆍ형방(刑房)ㆍ공방(工房)의 온갖 업무들[萬機]을 역대 중국과 조선의 사례를 들어가면서 자세하게 제시하였다. ≪목민심서≫가 다른 목민서들과 다른 점은 법령, 제도, 지방실정 및 통치술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토대로, 수령이 아전(衙前)들을 통솔하면서 지방 통치를 주도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자세한 지침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정약용은 1815년에서 1817년에 그의 경세학(經世學)의 핵심적 구상이 담겨있는 ≪방례초본(邦禮草本)≫를 저술하였고, 바로 그 이듬해인 1818년에 ≪목민심서≫를 저술하였다. ≪방례초본≫의 저작이 미완성인 채로 ≪목민심서≫의 저작으로 나아가게 된 계기는 ≪경세유표≫, <천관수제>, ‘고적지법(考績之法)’의 집필이었다. 그리고 1819년에는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하였다.
정약용이 그의 경세학의 기본을 이루는 정법삼집(政法三集)의 저술을 이와 같이 신속하게 완성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과 같았다.

≪목민심서≫

첫째, 저술하기 이전의 오랜 기간에 걸친 자료수집이 효율적인 저술을 가능케 했다. 그는, 저술은 단기간에 끝내지만, 저술을 위한 자료 수집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행하였다.
둘째, 정약용의 제자 및 자제들과의 협력이 신속한 저술을 가능케 했다. 자료 수집, 사료 발췌, 구술 필사, 정서(精書) 및 제책(製冊) 등의 작업은 10여명의 제자와 자제들의 몫이었다.
정약용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경세가로서 학문의 목적을 유교의 “수기치인(修己治人)”에 두어, 학문은 연구 그 자체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통하여 획득된 경륜(經綸)을 바탕으로 본인이 직접 현실정치에 이바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결되는 불역 ≪목민심서≫(L’art de gouverner) 것이라고 영역 ≪목민심서≫(ADMONITIONS ON GOVERNING THE PEOPLE) 보았다. 1789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1801년에 신유옥사(辛酉獄事)로 유배될 때까지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치는 기간은 물론 유배기간 중에도, 그는 수기치인이란 학문 정신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약용이 국가의 근본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경세유표≫를 저술하고 지방 정치의 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목민심서≫를 저술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목민심서≫는 두 가지의 이본(異本)이 있다. 하나는 1817년 강진(康津)에서 이루어진 초고본이고, 다른 하나는 이 초고본을 수정ㆍ가필하여 1821년에 마현(馬峴)에서 마무리한 완성본이다. 초고본이나 완성본 모두 12편 72조의 48권 16책이라는 체재(體裁)는 동일하다. 그러나 완성본은 초고본의 조명(條名)을 다소 바꾸고 문장을 수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대 중국과 조선의 순리(循吏)들의 선행(善行)에 관한 사례를 대폭 증보했기 때문에, 책의 분량이 3분의 1 이상 증가하였다. 목판본은 없다. 초고본의 필사본은 그 숫자가 10종에도 미치지 못하나, 완성본의 필사본은 1백여 종에 달할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 다산가에서 필사된 가장본 ≪목민심서≫는 제3책(제7권~제9권) 뿐이다. 초고본의 연활자본으로는 양재건(梁在謇)과 현채(玄采)가 교열한 1902년의 광문사(廣文社) 출판본이 있고, 완성본의 연활자본으로는 김성진(金誠鎭, 1874~1946)이 편집한 신조선사(新朝鮮社) 출판본(1935~1937)이 있다. 현재로서는 연활자본이 원본인 셈이다. 많은 종류의 국역이 있으나, 완성본의 완역본으로서는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 목민심서≫ Ⅰ~Ⅲ (1969)와 다산연구회의 ≪역주 목민심서(譯註 牧民心書)≫ Ⅰ~Ⅵ (1978~1985)가 있다. 일역본으로는 오오무라 토모노조(大村友之丞)와 아오야기 츠나타로(靑柳綱太郞)가 공편한 ≪牧民心書≫ 上/下 (1911)와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편저의 ≪朝鮮叢書≫ 1~3 (1936)이 있다. 불역본으로는 티에보(Philippe Thiébault)의 L’art de gouverner(2007)이 있으며, 영역본으로는 최병현의 ADMONITIONS ON GOVERNING THE PEOPLE - Manual For All Administrators (2010)가 있다.

≪목민심서≫는 12부(部) 72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목차는 <부임육조(赴任六條)>, <율기육조(律紀六條)>, <봉공육조(奉公六條)>, <애민육조(愛民六條)>, <이전육조(吏典六條)>, <호전육조(戶典六條)>, <예전육조(禮典六條)>, <병전육조(兵典六條)>, <형전육조(刑典六條)>, <공전육조(工典六條)>, <진황육조(賑荒六條)> 및 <해관육조(解官六條)>이다. 아래에서는 각 부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다.

제1부의 <부임육조>는 제배(除拜: 임명받음)ㆍ치장(治裝: 행장 꾸리기)ㆍ사조(辭朝: 하직 인사)ㆍ계행(啓行: 부임 행차)ㆍ상관(上官: 취임식)ㆍ이사(莅事: 업무의 시작)로 구성되어 있으며, 발령을 받고 현지에 부임하기까지 수령이 지켜야 할 몸가짐과 사무절차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제2부의 <율기육조>는 칙궁(飭躬: 바른 몸가짐)ㆍ청심(淸心: 맑은 마음가짐)ㆍ제가(齊家: 가정을 다스림)ㆍ병객(屛客: 청탁을 물리침)ㆍ절용(節用: 씀씀이를 절약함)ㆍ낙시(樂施: 베풀기를 즐김)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무수행 시 가져야 할 근엄한 자세와 청렴한 마음가짐 및 친인척에 대한 따뜻한 애정 등 수령에게 필요한 개인적 소양에 대하여 다루었다.
제3부의 <봉공육조>는 선화(宣化: 교화를 폄)ㆍ수법(守法: 법을 준수함)ㆍ예제(禮際: 예의바른 교제)ㆍ문보(文報: 보고서)ㆍ공납(貢納: 공물 납부)ㆍ왕역(往役: 차출 관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금의 덕화 선포, 법의 준수, 사신 및 상관과의 예법에 맞는 교제, 공납의 충실한 납부 및 이웃 고을에의 출장 등에 관하여 다루었다.
제4부의 <애민육조>는 양로(養老: 노인 봉양)ㆍ자유(慈幼: 어린이를 보살핌)ㆍ진궁(振窮: 궁핍함을 구제함)ㆍ애상(哀喪: 상을 당한 자들을 보살핌)ㆍ관질(寬疾: 병자를 돌봄)ㆍ구재(救災: 재난 구제)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자 그대로 노인, 어린이, 궁핍한 사람, 상을 당한 사람, 병든 사람 및 재난을 당한 사람 등 사회의 약자들을 돌보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제5부로부터 제10부까지는 <이전육조>ㆍ<호전육조>ㆍ<예전육조>ㆍ<병전육조>ㆍ<형전육조>ㆍ<공전육조>의 육전(六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령이 수행해야 할 만기(萬機)의 처리방안을 제시하였다. 이 부분이 수령의 지방 통치의 본령(本領)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군현의 제도, 법령, 업무 내용, 행정 실태 및 민간 사정에 관한 자세한 소개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서 수령이 지방통치의 업무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아전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목민심서≫가 수령의 지방통치를 위한 소상한 지침서이자 동시에 조선 후기의 지방실정을 알려주는 보고(寶庫)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제11부의 <진황육조>는 비자(備資: 구휼물자 비축)ㆍ권분(勸分: 부자의 역할)ㆍ규모(規模: 세부 계획 및 범위)ㆍ설시(設施: 진휼 시행책)ㆍ보력(補力: 민생안정책)ㆍ준사(竣事: 진황의 마무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는 것을 특별한 수령의 업무로 설정하여 그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3년 중에 1년이 풍년이면 나머지 2년간은 흉년이 들었던 조선 후기의 실정을 감안하면, 이 장의 설정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제12부의 <해관육조>는 체대(遞代: 관직의 교체)ㆍ귀장(歸裝: 돌아가는 행장)ㆍ원류(願留: 유임하기를 청원함)ㆍ걸유(乞宥: 수령에 대한 사면 청원)ㆍ은졸(隱卒: 재임 중의 사망)ㆍ유애(遺愛: 전 수령에 대한 사모)로 구성되어 있는데, 체임(遞任)에 항상 대비하고 치적과 고을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 것을 당부했다. 그러면서, 돌아가는 치장은 야윈 당나귀에 책 한 바리를 실을 정도면 맑은 바람이 불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지주(地主)들 중에는 일부 상인 계층도 있었지만, 그 대부분은 수령과 아전 출신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정약용이 해관(解官: 관직을 떠남)의 모습을 중요시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목민심서≫는 수령이 가져야 할 청렴한 몸가짐과 애민 정신, 그리고 지방 통치에 필요한 업무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지방 통치의 참고서이다. 그러므로 ≪목민심서≫가 다소간은 개혁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현행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 점에서 당시의 현행법을 초월하여 이상적인 국가 건설을 위한 개혁안을 제시한 ≪경세유표≫와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때문에 ≪목민심서≫를 곧바로 개혁적 사상을 담고 있는 저작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러 목민서들의 선구로 고려 말의 <수령오사(守令五事)>와 조선 초의 <수령칠사(守令七事)>를 꼽을 수 있다. <수령칠사>의 ‘칠사’는 농상성(農桑盛)ㆍ호구증(戶口增)ㆍ학교흥(學校興)ㆍ군정수(軍政修)ㆍ부역균(賦役均)ㆍ사송간(詞訟簡)ㆍ간할식(奸猾息)으로서 수령이 행해야 할 핵심적 정무들이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수령칠사 및 수령의 각종 업무보고서들과 중국의 목민서들을 참고하여 ≪치군요결(治郡要訣)≫ㆍ≪정요(政要)≫ㆍ≪치군요법(治郡要法)≫ㆍ≪거관대요(居官大要)≫ㆍ≪목민고(牧民攷)≫ 등의 여러 가지 목민서들이 저술되었다. 그러나 이런 목민서들은, ≪거관대요(居官大要)≫를 제외하면 모두 비체계적이고 단편적인 저술들로서, 만기(萬機)를 주재해야 할 수령의 지방 통치 지침서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약용은 수령이 아전을 통제하면서 지방통치를 주도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지방 통치에 있어서 핵심적 문제 사항 중의 하나는 ‘수령은 나그네이고 아전이 주인[강류석존(江流石存)]’인 사회적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역전시키려면 수령이 지방 행정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었다. 수령이 지방 행정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하나는 수령의 업무를 체계화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수령이 지방 사정을 철저히 파악하는 일이었다. ≪목민심서≫는 이를 위해서 집필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목민심서≫는 종전에 지방의 자치 조직에 크게 의존했던 지방 통치를 중앙권력이 보다 강력하게 장악할 수 있게끔 노력했던 과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목민심서≫를 포함하는 조선 후기의 목민서들은 중상주의나 관방학과는 달리 상업을 통한 재정의 확보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금속 화폐의 발행이나 도량형의 정비 등 상업 질서의 확립을 위한 제도 정비 방안을 산발적으로나마 제시했던 점이 주목된다. 이런 점에서 ≪목민심서≫는 근대의 여명기(黎明期)를 알리는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안병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