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서언 易學緖言

정약용의 역학 논설 21편을 묶어 놓은 책. ≪주역사전(周易四箋)≫과 함께 역학 분야의 대표적 저술.

반고(班固, 32~93)의 ≪한서 예문지(漢書藝文志)≫부터 청(淸) 대 이광지(李光地, 1642~1718, 자:厚菴)의 ≪주역절중(周易折中)≫(1715)까지, 역학의 주요 전적(典籍)들에 대한 논평이다. 또한 정약용 자신의 역학 이론을 문답식으로 피력한 편들도 있다. 그 중 <현산역간(玆山易柬)>은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의 편지글을 정리한 것이기에 정약용의 글은 20편이라 할 수 있다.

≪역학서언≫은 전체 간기(刊記)가 없으므로 그 완성 시기는 추정해볼 수 밖에 없다. 현손(玄孫) 정규영(丁奎英, 1872~1927)이 편찬한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는 1808년에 ‘12권의 ≪주역서언(周易緖言)≫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더불어 “잉언(賸言), 서언(緖言), 답객난(答客難)” 등을 언급한 정약전의 글이 인용되고 있다(순조 8년, 무진년 조). 이 “주역서언”과 “서언”이 ≪역학서언≫의 원형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무진본(戊辰本) ≪주역사전≫이 나온 1808년에, ≪주역≫만 집중적으로 연찬했다는 1803년 이후의 성과를 1차적으로 반영한 ≪역학서언≫이 존재했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한편 편별로 저술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이정조집해론(李鼎祚集解論)>과 <정강성역주론(鄭康成易注論)>은 1820년, <래씨역주박(來氏易註駁)>과 <이씨절중초(李氏折中鈔)>는 1821년에 완성되었다. 다른 편들에는 간기(刊記)가 없다. 이를 통해 1808년 이후 환갑을 맞은 1821년까지도 수정ㆍ보완했음을 알 수 있다. 환갑이 지난 이후에도 정약용이 다른 저술들을 개정하고 합편하는 등의 작업을 지속했던 사실을 근거로 추정해본다면 현존하는 ≪역학서언≫은 적게 잡더라도 1803년부터 1821년까지 거의 20년에 가까운 시간에 걸쳐 완성한 필생의 작품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까지(2010년) ≪역학서언≫의 판본은 ① 정인보(鄭寅普, 1893~1950, 호:爲堂)ㆍ안재홍(安在鴻, 1891~1965)이 교열한 ≪여유당전서≫(신조선사(新朝鮮社), 1936)에 수록된 것, ②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③ 일본의 쯔꾸바(筑波) 대학 소장본, 세 가지가 확인된다. ≪여유당전서≫ 수록본은 활자 인쇄본이고,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과 쯔꾸바 대학 소장본은 필사본이다. ≪여유당전서≫ 수록본은 4권 체제로 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과 쯔꾸바 대학 소장본은 그 목차에는 모두 12권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모두 13권 체제이다. <오초려찬언론(吳草廬纂言論)>이 목차에서는 ‘권지칠’(卷之七)에 속하는 편으로 나오지만 본문에서는 ‘권지팔’(卷之八)로 되어 있고, 그 이후 나머지 편들이 모두 한 권씩 뒤로 물려져 있어 결국 13권이 된다. 다산학술문화재단의 ≪여유당전서≫ 정본화사업에서 현행 ≪여유당전서≫ 수록본 ≪역학서언≫과 이본(異本)들과의 비교⋅교감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이본들은 내용상 현행본과 동일한 책이며, 현행본의 탈오자 판정에 약간의 도움이 되는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기본적으로 정약용 자신이 재구성한 “역리사법(易理四法)”, 즉 추이(推移)ㆍ효변(爻變)ㆍ물상(物象)ㆍ호체(互體)라는 간명하고 강력한 방법론에 입각하여 역학사(易學史)의 주요 학설들을 엄밀하면서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내용의 개략은 다음과 같다.
(1)<이정조집해론(李鼎祚集解論)>: 이정조(李鼎祚, 685~779년 사이 추정)의 ≪주역집해(周易集解)≫(762년 완성)에 대한 논평. 공영달(孔穎達, 574~648) 등이 편찬한 ≪주역정의≫를 이어 양한(兩漢) 이후 역학을 총결한 저작이라 평가된다. 정약용도 ≪주역≫ 이해에 필수적인 책으로 지목했다.
(2)<정강성역주론(鄭康成易注論)>: 정강성(鄭康成, 127~200)의 역주(易注)는 완정한 형태로 전하지는 않으나, 주요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충분히 남아 있는데, 정약용은 이 편에서 대개 비판적ㆍ부정적 입장에서 그의 역설을 다루었다.
(3)<반고예문지론(班固藝文志論)>: 반고(班固, 32~93)가 찬수한 ≪한서 예문지(漢書藝文志)≫, <육예략(六藝略)> 등의 역학 부분을 발췌ㆍ논구한 것. 한(漢) 대까지 역학 전수 계보를 알 수 있는 글이다. 십익(十翼)에서 문언전(文言傳)을 제외시키는 등의 정약용의 독특한 견해가 제시되었다.
(4)<한위유의론(漢魏遺義論)>: 공영달의 ≪주역정의(周易正義)≫에서 마융(馬融, 79~166, 자:季長)ㆍ왕숙(王肅, 195~256)ㆍ육적(陸積, 187~219) 등의 설을 발췌하여 비판ㆍ논평하였다.
(5)<왕보사역주론(王輔嗣易注論)>: 왕필(王弼, 226~249, 자:輔嗣)의 ‘삼현학(三玄學)적 역설(易說)’ 또는 ‘도가적(道家的) 역설’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6)<한강백현담고(韓康伯玄談考)>: 한강백(韓康伯, 332~380)은 십익에서 왕필이 풀이하지 않은 <계사전>, <설괘전(說卦傳)>, <서괘전>, <잡괘전>에 대해, 왕필의 취지를 잇는다는 의도로 주석을 달았다. 정약용은 이 편에서 한강백의 <계사전> 주석에서 9개 항목을 골라 비판하였다.
(7)<공소백일평(孔疏百一評)>: 당대(唐代)의 ≪오경정의(五經正義)≫의 일환인 ≪주역정의≫는 공영달 사후 653년에 반포되었지만 공영달이 생전에 주관했기에 ‘공소’라 불린다. 정약용은 그 중 19항목을 논평했다. ‘백일’이란 ‘백에 하나’라는 말로, ‘간략한 논평’이라는 뜻이다.
(8)<당서괘기론(唐書卦氣論)>: 대혜선사(大慧禪師) 일행(一行, 683~727)의 ‘대연력(大衍曆)’이 근거한 ‘분괘직일법(分卦直日法: 괘를 나누어 춘ㆍ추분의 절기와 날짜에 배당하는 방식)’을 비판한 편. 이런 역법(曆法)이 ≪신당서(新唐書)≫⋅≪구당서(舊唐書)≫의 역지(曆志)에 나오기에 제목이 ‘당서…’이다. 요지는 ‘역(易)은 역(曆)을 본받을 수 있지만 그 반대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9)<주자본의발미(朱子本義發微)>: 주희(朱熹, 1130~1200, 호:晦庵)의 ≪주역본의≫를 면밀히 살피면서, 주희의 견해가 정약용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10)<소자선천론(邵子先天論)>: 소옹(邵雍, 1011~1077, 호:安樂)의 ‘선ㆍ후천론(先後天論)’과 그것이 기반한 <하도(河圖)>ㆍ<낙서(洛書)>의 논리를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11)<사수고점박(沙隨古占駁)>: 남송(南宋) 정형(程逈, 미상. 주희의 선배)의 ≪주역고점법(周易古占法)≫에 대한 반박. 이는 결국 주희의 ‘본서법’(本筮法)에 대한 반박이 된다.
(12)<오초려찬언론(吳草廬纂言論)>: 원나라 오징(吳澄, 1249~1333, 호:草廬)의 ≪역찬언(易纂言)≫에 대한 논평. ‘찬언’이란 ‘설을 모아서 엮었다’는 겸손한 표현이지만, 나름의 입장과 탁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약용도 ‘소옹의 영향을 못 벗어났으나, 간혹 명론이 있다’고 평했다.
(13)<래씨역주박(來氏易註駁)>: 명(明)나라 래지덕(來知德, 1525~1604, 호:瞿塘)은 ‘착(錯)’·‘종(綜)’이라는 방식으로 ≪주역≫을 해석했다. 정약용은 이에 대해, 수은으로 거울을 연마하는 데 왕필은 아무 효과도 없는 맹물을 사용했다면, 래씨는 기왓장 가루를 사용하여 거울의 원판 자체를 도리어 망쳤다고 했다. 29조항에 걸쳐 비판했다.
(14)<이씨절중초(李氏折中鈔)>: 청(淸)나라 이광지의 ≪주역절중(周易折中)≫(1715)을 분석ㆍ비판한 글. ‘절중’은 ‘절충’의 뜻인데, 정약용은 이광지의 이런 작업의 성과에 대해, 쓸데없는 것들만 모아 두었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15)<육덕명석문초(陸德明釋文鈔)>: 당(唐)나라 육덕명(陸德明, 550?~630)의 ≪경전석문(經典釋文)≫(583)의 ≪주역≫ 부분에 대한 논평. <유혼ㆍ귀혼괘(游魂歸魂卦)>를 포함하여 34항목을 논하였다.
(16)<곽씨거정박(郭氏擧正駁)>: 곽경(郭京, 성당기(盛唐期)로 추정, ?~?)의 ≪주역거정(周易擧正)≫을 논박했다. 그는 왕필ㆍ한강백이 전수한 진본을 얻었다면서 ≪주역≫ 원문을 대개 ‘103절’(節) 또는 ‘135처’(處)를 고쳤는데, 정약용은 이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17)<왕채호이평(王蔡胡李評)>: ‘왕ㆍ채ㆍ호ㆍ이’는 역학자 4인의 성으로서 ①왕응린(王應麟, 1223~1296), ②채원정(蔡元定, 1135~1198, 자:季通, 호:西山), ③호방평(胡方平, 미상), ④이광지이다. 이들이 무슨 연관이 있어서 같이 묶은 것은 아니고, ‘기타 등등의 사항’이라는 의미 또는 짧은 분량을 고려하여 합철한 것으로 생각된다.
(18)<복서통의(卜筮通義)>: ≪예기≫ㆍ≪의례≫ㆍ≪주례(周禮)≫를 중심으로 ≪춘추좌씨전≫과 ≪국어(國語)≫를 아우르고, 장현(張衡, 72~139)의 <사현부(思玄賦)>까지 망라하여 복서(卜筮)의 절차와 사례를 분석하고 의미를 논구한 편이다.
(19)<주역답객난(周易答客難)>: 정약용 자신의 역설(易說)의 논란 점을 문답식으로 풀었다. 갑ㆍ을ㆍ병 세 사람이 ‘의리역학적’적 관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 봄직한 질의를 각각 세 차례씩 하고, 정약용이 그에 답변하는 내용이다.
(20)<현산역간(玆山易柬)>: 둘째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유배지인 흑산도(黑山島)에서 보낸 편지글에서 역학 관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현산’은 흑산(黑山)의 아칭(雅稱)이다.
(21)<다산문답(茶山問答)>: 47항의 문답으로, 답변자는 정약용이다. 질문자는 이강회(李綱會: 3회 질의), 윤응겸(尹應謙: 1회), 이청(李𤲟: 6회), 신대윤(申大允: 1회) 등 유배지의 제자들과 아들인 학가(學稼: 12회)와 학포(學圃: 2회)이다. 이들의 질문이 모두 25회이며, 나머지 22회는 질문자가 명기되지 않았다.

≪역학서언≫은 분량으로만 보면 ≪주역사전≫의 반 정도여서 대작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2천년 역학사를 다루는 방대한 작업이다.
“서언(緖言)” 은 ‘서언(敍言: 차례에 따른 체계적인 말)' 과 ‘여언(餘言: 나머지 말)' 의 이중적 의미로 이해된다. ‘緖(서)‘를 ‘차례[敍]' 로 보아 ‘역학서언’의 의미를 해석한다면 ≪역학서언≫은, 책의 편집이 시대 순에 따라 ‘한역(漢易)' 과 ‘송역(宋易)' 그리고 기타 논설을 구분ㆍ안배하고 있고, 내용적으로도 각기 독립적인 21편의 글들이 서로 계통적ㆍ보완적인 역할을 하기에 ‘역학에 관한 체계적인 글’로 이해할 수 있다. 정규영이 연보에서 ‘제가(諸家)의 주석을 취하되, 계통적으로 정리하여 해석ㆍ논평함[次第疏論]에, 주역서언이라 이름했다’ 고 기술한 것은 이런 취지에서였다(≪俟菴先生年譜≫, 순조 8년). ‘緖(서)‘를 ‘나머지[餘]' 로 보아 ‘역학서언’의 의미를 해석한다면 ≪역학서언≫은 ‘≪주역사전≫에서 미처 다하지 못한 나머지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주역사전≫은 역학사(易學史)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점하므로 기존의 통설이나 선입견에 기반해서는 이해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주저를 보완하는 언설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역학서언≫은 그 자체로 독립적 의의를 가지는 정약용의 역작임이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분명 다산역학의 본령인 ≪주역사전≫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역학서언≫은 완성 시기가 ≪주역사전≫ 이후이고, 내용도 주로 ≪주역사전≫에서 확립된 방법론과 이론에 입각하여 여러 학설들을 비평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역학서언≫은 그 중요성이 낮게 평가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학서언≫에 보이는 역학사(易學史)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이미 전제되지 않았다면 ≪주역사전≫과 같은 새롭고 획기적 작업을 시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역학서언≫이 가지는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장정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