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속찬 耳談續纂

정약용이 중국의 고전과 역사서에 기록된 속담 177장(章)과 한국 속담 214장을 수집하여 4언 2구로 한역(漢譯)하고 뜻을 풀이한 속담집.

정약용은 ≪이담속찬≫ 편찬을 통해 ① 명(明)나라 왕동궤(王同軌, ?~?)의 ≪이담(耳談)≫이 누락한 고전과 역사서에 있는 속담을 보완하고, ② 한국 속담 389장을 한역(漢譯, 4언 2구)한 이익(李瀷, 1681~1763, 호:星湖)의 ≪백언해(百諺解)≫에 협운(叶韻)을 넣고, ③ 한국 속담 중 누락된 것들을 보충하고자 하였다.
신작(申綽, 1760~1826, 호:石泉)이 중국 속담 10여 장을, 정약용의 둘째 형인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이 흑산도 유배지에서 한국의 속담 60장을 수집해 보내주었다. 이를 모아서 유배에서 풀려난 다음 해인 1820년(순조 20년, 庚辰) 봄에 정리‧완성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열수전서속집(冽水全書續輯)≫(필사본) 제10권,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여유당집≫(필사본) 제30권, 신조선사의 ≪여유당전서≫ 제1집, 잡찬집 제24권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호고당(好古堂)에서 출판(1891년 이전 추정)한 ≪이담속찬≫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에는 “열수 정약용이 편집하다.[洌水丁鏞輯.]”, “아래는 정약전이 수집한 내용이다.[已下巽菴所輯.]”, “이상의 210장 중 정약전이 수집한 것은 60장이다.[己上二百一十章 巽菴所輯六十章.]”와 같은 기록이 있다. 그러나 신조선사 ≪여유당전서≫본은 정약용 ‘편집[輯]’을 정약용 ‘저술[著]’로 바꾸었으며, ‘정약전이 수집했다’는 등의 주석을 삭제하여 ≪이담속찬≫ 편찬에 관련된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과 한국의 속담 391장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중국 속담을 다룬 <중언(中諺)>은 고전과 역사서에 인용된 177장을 수록하고 출전을 밝혔다. 이어서 한국 속담을 다룬 <동언(東諺)>은 속담 214장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의미를 해설하였다.

<중언>

≪상서(尙書)≫, <반경(盤庚) 상(上)>의 지임(遲任, ?~?, 중국 은나라의 현인)이 인용한 “사람은 오래된 사람을 구하지만 그릇은 오래된 것을 구하지 않는다.[人唯求舊, 器非求舊.]”로 시작하여,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에서 조량(趙良, ?~? 진나라 때의 은사)이 상앙(商鞅, 기원전 395 ~ 기원전 338. 진시황 때의 재상)에게 말한 “천 마리 양의 가죽이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털보다 못하며, 천 명의 신하가 떠는 것이 한 사람의 선비가 곧은 소리를 하는 것만 못하다.[千羊之皮, 如一狐之掖, 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까지 속담 177장을 수록하였다.

<동언>

<동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정약용 자신이 수집한 속담 150장을 수록(“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三歲之習, 至干八十.]”부터 “강아지에게 메주 멍석 맡긴 것 같다.[莫以狗子, 監此麴豉.]”까지)하였으며, “이하는 한국 속담이다. 어떤 속담은 협운을 맞추지 않았는데 이 역시 오래된 방식이다.[已下東諺. 或不叶韻 亦古法也.]”라고 하며 시작하였다.
다음은 정약전이 수집한[已下巽菴所輯] 속담 60장을 수록(“모난 돌이 정 맞는다.[壘壘者石, 銛者多觸.]”부터 “산은 꿩은 길들이지 못하고 연못은 게를 기르지 못한다.[山不馴雉, 池不養蟹.]”까지)하였다. 정약용은 “이상 210장 중 정약전이 수집한 것이 60장[己上二百一十章, 巽菴所輯六十章.]”이라고 밝혔다.
정약용은 총 210장의 한국 속담을 4언 2구로 협운을 맞추어 한문으로 번역하고 그 의미도 풀이하였다. 이러한 협운을 고려한 번역을 ≪이담속찬≫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이익의 ≪백언해≫와 비교하면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이익은 “열 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 없다”를 “용십부작, 목무불전(用十斧斫, 木無不顚)”으로 번역하였으나, 정약용은 “십작지목 망불전복(十斫之木, 罔不顚覆)”으로 앞뒤 구절의 4번째 글자를 ‘목(木)’과 ‘복(覆)’으로 협운을 맞추어 한역하였다. 이외에도 한국 속담을 한역한 예를 보면, “말똥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를 “수와마분, 차생가원(雖臥馬糞, 此生可願)”으로 앞뒤 구절의 4번째 글자를 ‘분(糞)’과 ‘원(願)’으로 협운을 맞추어 번역하였다. 그 의미는 “비록 곤욕스럽더라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言, 雖苦辱, 猶善於死也.]”라고 설명하였다.
<동언> 중 마지막 4장인“유장무장(惟杖無將: 매에는 장사 없다.)”, “경투하사(鯨鬪鰕死: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 “수소유초(雖小唯椒: 작은 고추가 맵다.)”, “영측십장수탐, 난측일장인심(寧測十丈水深, 難測一丈人心: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알기 힘들다.)”은 4언 2구(총 8언)의 형태로 번역하지 않았다.

≪이담속찬≫은 조선의 한역 속담집 중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순오지(旬五志)≫(총143장), 이익의 ≪백언해≫(총389장), 신후담(愼後聃, 1702~1761, 호:河濱)의 ≪찰이록(察邇錄)≫(총52장), 이덕무(李德懋, 1741~1793, 호: 雅亭)의 ≪열상방언(冽上方言)≫(3언 2구, 총99장)에 이어 다섯 번째로 편찬되었다.
≪이담속찬≫에서 이익의 ≪백언해≫의 속담을 협운에 맞추어 다시 번역했던 사실에서 정약용이 성호학(星湖學)을 계승‧발전시키고자 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정약용이 한국 속담을 4언 2구로 협운한 것은, 한국 속담도 ≪시경≫이나 고시처럼 운문(韻文)으로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고, 또한 이를 시문 등에 인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한국 속담을 협운에 맞추어 한문으로 번역하다 보니 속담의 원래 뜻과 거리가 생기게 된 것도 있었으며, 속담의 원래 형태를 정확히 추측할 수 없는 것들도 생겼다. 때문에 혹자는 정약용이 한국 속담을 한글로 기록하지 않고 굳이 한역을 했던 것에 대해 비판을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속담을 한문 운문으로 번역하여 널리 활용토록 하려 한 정약용의 노력은 주체적 문화 의식의 발로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김상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