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흠신서 欽欽新書

살인사건 처리에 관련된 법이념과 역사적 사례, 사건처리지침과 개별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5개편으로 나누어 수록한 정약용의 전문법학서.

유교에서는 인명을 중시하여 오직 하늘만이 사람의 생살(生殺)을 결정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념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목민관은 살인사건을 항상 다루지만, 조사와 처리가 미흡하여 죄의 결정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았다. 직접 사건을 처리하는 수령(守令)들은 율(律)에 어두워 살인사건의 처리를 아전(衙前)들에게 맡겼는데, 아전들이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다. 결국 인명존중과 살인자 처벌의 정의를 실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살인사건의 처리지침서인 ≪흠흠신서≫를 편찬하여 한편으로는 ‘살인자사(殺人者死)’라는 정의를 실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함[冤抑]이 없기를 추구하였다.
≪흠흠신서≫는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준초(批詳雋抄)> 5권, <의율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祥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 등 3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교형사사법의 이념과 실례 그리고 중국과 조선의 사례를 들었으며,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정약용의 비평과 의견을 수록하였다. 이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비판을 바탕으로 입법론(立法論)과 해석론(解釋論)을 전개한 것이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 따르면 ≪흠흠신서≫는 1819년에 완성되었으나, 그 <서문(序文)>은 1822년에 작성되었다. <서문>에는 ≪목민심서(牧民心書)≫가 완성된 후에 ≪흠흠신서≫를 편찬하였다고 했다. ≪목민심서≫는 1818년과 1821년에 완성되었는데, ≪흠흠신서≫는 재고본(再稿本)에서 인용되고 있으므로, 1818년 이후 편찬에 착수된 것으로 보인다.
≪흠흠신서≫는 ≪사안(事案)≫ㆍ≪흠형전서(欽刑典書)≫ㆍ≪청명록(淸明錄)≫ 등을 토대로 완성되었다. ≪사안≫(전5책)에는 12개 항목 113개의 사례가 있는데, 이 중 <상형추의>에 67개의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사안≫은 내용이 길고 정약용의 의견이 없는 반면에 ≪흠흠신서≫는 내용이 요약되어 있고 정약용의 의견이 있는 점이 다르다. 따라서 ≪사안≫이 초안에 해당한다. <상형추의>는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의 개별사건에 대한 판단인 어판(御判)을 수록한 ≪상형고(祥刑考)≫에 기초하여 편찬되었으므로 ≪사안≫도 같을 것이다.
≪흠형전서≫는 13개의 항목 48건의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모두 ≪흠흠신서≫의 <상형추의>와 <전발무사>에 흡수되었다. 이에 수록된 사건은 1807년이 마지막으로 1807년 이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목민심서≫에서는 ≪흠흠신서≫를 인용하고 있는데, 동일한 내용이 ≪목민심서≫ 초고본에서는 그 출처가 ≪청명록≫으로, 재고본에서는 그 출처가 ≪흠흠신서≫로 표시되어 있다. <사암선생연보>에서는 “≪흠흠신서≫의 초명은 ≪청명록≫인데, ≪서경(書經)≫, <우서(虞書)>, ‘요전(舜典)’의 ‘삼가고 삼가사 오직 형벌을 주는 것이 조심스럽구나. [欽哉欽哉, 惟刑之恤哉.]’를 인용하여 책이름을 바꾸었다.”고 언급하였다.
≪흠흠신서≫는 경세학의 전체적인 구상 아래에 ≪경세유표(經世遺表)≫와, 특히 ≪목민심서≫의 편찬과 긴밀하게 진행되었다. ≪흠흠신서≫의 초고본인 ≪청명록≫은 1807년 이후에 착수하여 ≪목민심서≫ 초고본이 완성된 후 서명을 ≪흠흠신서≫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여 1819년에 재고본을 완성하고 1822년 최종본을 완성하였다. 1표2서는 순차적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동시에 상호보완적으로 진행되었다.

≪흠흠신서≫(廣文社, 1901(光武 5))

≪흠흠신서≫(필사본, 1822(순조 22))

정약용의 저작이 최초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황성신문(皇城新聞)≫ 1899년 4월 17일, 18일자의 장지연(張志淵, 1864~1921, 호:韋庵)의 논설에서이다. 장지연은 광문사(廣文社)를 설립하여 정약용의 저작을 출판하였는데, ≪흠흠신서≫ 작업은 주로 1901년(광무 5)에 진행ㆍ출판되었다. 손자 정대무(丁大懋, 1824~?)가 서문을, 민치헌(閔致憲, 1844~1903)ㆍ현상건(玄尙建, ?~?)ㆍ증손자 정문섭(丁文燮, 1855~?)ㆍ현손 정규영(丁奎英, 1872~1927)이 발문을 쓴 ≪흠흠신서≫가 최초로 공간(公刊)되었다. 이후 1907년에 탑인사(搭印社)에서 재간행되었다. 1936년 정약용 서거 100주년을 맞이하여 정인보(鄭寅普, 1893~1950, 호:爲堂) 등이 중심이 되어 간행한 ≪여유당전서≫ 제5집, 정법집 제30권~제39권(신조선사(新朝鮮社), 1936)에 ≪흠흠신서≫가 수록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광문사 간행본이 신조선사(新朝鮮社) 간행본보다 더 정확하다. 또 필사본은 국내에 36종, 국외에 18종 총 54종이 확인된다. 여러 종의 필사본들은 항목 구성이나 내용상 큰 차이는 없고, 모두 정약용의 후손인 정문섭과 정규영 소장 원본인 삼고본(三稿本, 1822)을 대상으로 한 듯하다.

≪흠흠신서≫는 <경사요의>, <비상준초>, <의율차례>, <상형추의>, <전발무사> 등 5부로 구성되어 있다.

<경사요의>(전3권)

법률의 기본원리를 유교경전에서 추출한 것으로 법률에 없는 것은 경전과 사전에서 보충한다는 ‘인경주률(引經注律)’의 입장에 따라 경의(經義) 27조, 사실(史實) 115건을 추출하였다. 제1권에서는 경전에서 법 원칙을 추출하고 2, 3권은 중국과 우리의 사서에서 선례를 추출하여 유형별로 정리한 것이다. 115건의 사실 중 우리의 것은 36건으로 이중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야사류에서, 중국 것 79건 중 39건은 ≪의옥집(疑獄集)≫과 ≪절옥귀감(折獄龜鑑)≫에서 인용하였다.

<비상준초>(전5권)

수령이 살인사건에 대한 보고서인 검보(檢報)를 작성할 때, 특히 결론에 해당하는 발사(跋辭)와 관찰사(觀察使)가 작성하는 제사(題詞)의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 청의 비판(批判)과 조선의 신상(申詳)을 수록하고 이에 대한 해설과 비평을 덧붙였는데, 모두 70건이다. 특히, 중국 용어와 조선 고유의 법률용어에 대한 설명이 많으며, 실무지침서의 성격이 짙다.

<의율차례>(전4권)

모두 187건의 사례를 작게 24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대명률(大明律)≫에서는 살인을 6개의 유형으로 나누고 그에 따라 형벌 등을 다르게 취급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제시하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여기서는 ≪대명률≫과 그 관련 서적만이 아니라 ≪대청률(大淸律)≫ 및 그 관련 서적까지 인용하였다.

<상형추의>(전15권)

≪흠흠신서≫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정조 재위기의 실제 사건 145건을 골라 22개의 유형으로 분류하여 개요를 제시하고 주석과 비평을 하였다. 이의 출전은 ≪상형고(祥刑考)≫이다. 가장 큰 특징은 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의 6분주의(六分主義)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실질에 바탕을 두고 분류한 것이다. 이는 ≪흠흠신서≫가 실제사건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발무사>(전3권)

일종의 부록으로 정약용이 수령과 형조참의로 재직할 때나 유배 이후 등 직간접으로 경험한 사건을 소개한 것이다. 직접 사건을 처리하고 의견을 제시한 것은 7건, 유배 시절에 듣고서 제3자적 입장에서 논한 것 9건, 총 16건을 앞의 분류에 따라 정리하였다. 부록인 매장된 시체를 검험(檢驗)하는 굴검법(掘檢法)에 대해 소개ㆍ해설하였다.

조선에서는 율학(律學)에 대한 전문적인 서적이 없었는데, ≪흠흠신서≫는 그 최초ㆍ최고의 전문서적이다. ≪흠흠신서≫는 경사(經史)에서 살인사건의 처리와 관련된 유교이념과 구체적인 전거를 제시하여, 이해를 도왔다. 구체적으로 살인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할 때 도움이 되도록 실례를 제시하고 상세한 설명과 비판을 덧붙여 실무에 편익을 제공하였다. 또 실제의 사건처리에서 처리하기 힘든 애매한 사건을 유형별로 나누어 판단에 도움을 주었다. 나아가 정약용이 직접 처리하거나 보고 들은 사건을 소개하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구성은 현대 법학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다. 즉, ≪흠흠신서≫는 <경사요의> 등에서 해석론을 전개하고 <의율차례> 이하에서는 개별 사건의 처리에 대해 비판을 하였는데, 이는 판례평석(判例評釋)에 해당한다.
1표2서의 구성은 ≪경세유표≫에서는 입법론을, ≪흠흠신서≫에서는 해석론을, ≪목민심서≫에서는 구체적인 시행지침을 제시한 점에서 입법ㆍ사법ㆍ행정을 아우르는 법 집행의 전체적인 모습을 제시하였다.
후대에 이를 요약한 ≪흠서요개(欽書要槪)≫, ≪흠서철영(欽書綴英)≫ 등이 있고 또 후손들조차도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수령 등이 정약용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문의를 한 경우가 많은데, 후대에 상당히 유포되고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반박하는 ≪흠서논박(欽書論駁)≫ 등도 있어서 후대에 미친 영향은 크다.

(정긍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