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언각비 雅言覺非

조선 후기에 사용된 각종 용어와 문자에 대하여 그 잘못된 용례를 바로잡고자 집필된 정약용의 저서.

1819년(순조 19)에 정약용이 당시에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와 문자 450여 가지에 대하여 중국의 각종 문헌과 시문에 근거하여 어원을 밝히고, 해박한 설명을 더하여 잘못된 점을 바로잡은 책이다.

이 책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소인(小引)>에 의하면 ≪아언각비≫는 정약용이 강진(康津)에서 해배되어 돌아온 이듬해인 1819년 겨울에 완성되었다. 정약용은 1801년 3월 유배지인 경상도 장기에서 ≪이아술(爾雅述)≫ 6권을 지어 문자의 올바른 쓰임에 대하여 연구한 사실이 있지만, 이 책은 그해 10월에 서울로 다시 붙잡혀 오는 와중에 분실하여 전하지 않는다. 한편 이 해에 정약용은 이익(李瀷, 1681~1763, 호:星湖)이 모아놓은 속담에 운을 달아 한시로 엮은 ≪백언시(百諺詩)≫를 저술해 속담에 담긴 뜻을 교육하는 자료를 만들기도 했다. ≪아언각비≫ 또한 일상에서 잘못 쓰이고 있는 언어와 문자에 대한 올바른 각성을 통하여 참다운 배움에 이르고자 한 정약용의 학문적 열망이 반영된 저작이다. 그는 1801년 11월에 감옥에서 풀려나 전라도 강진으로 다시 유배된 뒤 틈틈이 자료를 축적하여 두었다가, 해배되어 돌아온 이듬해인 1819년 최종 정리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아언각비≫는 1819년(순조 19) 3권 1책의 한문본으로 저술된 이후, 1911년 고서간행회(古書刊行會)에서 국판(菊版) 92면으로 ≪파한집(破閑集)≫ㆍ≪보한집(補閑集)≫ㆍ≪익재집(益齋集)≫ㆍ≪동인시화집(東人詩話集)≫과 합편(合編)하여 간행되었다. 이듬해에는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주간(主幹)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국판 108면으로 간행하였고, 같은 해 신문관(新文館)에서도 후손 정규영(丁奎英, 1872~1927)이 기증한 사실을 밝혀 간행하였다. 그 뒤 1936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 제1집, 잡찬집에 수록되었다. 이외 다수의 필사본이 전하며 몇 종의 국역서가 출간되었다.

구성 및 내용

≪아언각비≫의 체제는 소인(小引), 목차, 본문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의 구체적인 항목은 아래와 같다.
권1에는 장안(長安)ㆍ낙양(洛陽), 경구(京口), 태수(太守)ㆍ사군(使君), 쉬(倅), 방백(方伯) 등.
권2에는 납채(納采), 초(醮), 수(嫂), 숙(叔), 매(妹) 등.
권3에는 태묘(太廟), 시(尸), 태복(太僕), 선마(洗馬), 좨주(祭酒) 등.
총 200여 항목에 450여 개 이상의 단어가 수록되었다. 대체적으로 같은 종류의 성격을 지닌 어휘를 모으려고 하였으나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

어휘의 분류

≪아언각비≫는 주제별로 어휘를 분류한 것으로 보이는데, (1) 관직 및 제도, (2) 인칭 및 지명, (3) 생활도구, (4) 자연 및 동식물, (5) 자의(字意), (6) 의미 및 음운, (7) 의식주의 주제들로 정리할 수 있다. 구체적 어휘들을 살펴보면 중국에서 어원을 찾은 것이 220여 개로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 외에 어원을 밝히지 않은 것들 역시 한국에서 만들어진 어휘와 글자 26개를 제외하면 대부분 중국에서 그 어원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애초에 어원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서술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상당수의 어휘들을 어원적으로 설명했다고 할 수 있다.

설명방식과 특징

≪아언각비≫의 구체적인 어휘의 설명방식과 특징으로는,
첫째, 사용하는 용법이 달라져 잘못되었음을 밝힌 사례이다. 용례로 ‘경구(京口)’라는 장소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를 ‘경강(京江)의 어귀[口]’로 여겨 ‘서울’을 이르는 말로 사용한 경우 등이다.
둘째, 한자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달라져 잘못되었음을 밝힌 사례이다. 용례로 ‘산다(山茶)’라는 나무를 잘못 이름하여 ‘동백(冬柏)’이라 하고, 이 나무에서 피는 꽃을 ‘춘백(春柏)’이라고 하여 ‘산다’라는 이름이 없어져 버린 경우 등이다.
셋째, 형(形)ㆍ음(音)ㆍ의(義)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쓰임이 혼란스러운 사례를 밝혔다. 이를 다시 자세히 나누어 보면,
동훈(同訓: 말은 같지만 뜻이 다른 글자)의 예로 함(鹹)ㆍ직(織) 따위이다.
훈동(訓同: 뜻은 다르지만 말은 같은 글자)의 예로 소(掃)ㆍ고(苦)ㆍ사(寫)ㆍ용(用) 따위이다.
동의(同義: 다른 뜻의 글자를 같은 말로 쓰는 경우)의 예로 어(魚)ㆍ육(肉) 따위이다.
이음(異音: 같은 글자 또는 같은 뜻이면서 음이 다른 경우)의 예로 김(金)ㆍ금(金), 한(澣)ㆍ완(浣) 따위이다.
이자(異字: 다른 글자를 잘못 쓰는 경우)의 예로 환(宦)ㆍ환(䆠) 따위이다.
음운(音韻: 음운이 달리 쓰이는 경우)의 예로 솰(刷)과 잡(箚)이 모두 입성(入聲)이지만 각각 ‘쇄’와 ‘차’로 달리 만들어진 것 등을 설명하였다.
넷째, 중국에서 전해질 때 풍습이나 관습의 차이로 그 뜻이 잘못 쓰였음을 지적한 사례이다. 용례로 초(醮)ㆍ숙(叔)ㆍ고(姑) 따위를 예로 들었다.
다섯째, 중국음이 잘못 옮겨져 한자가 달라진 경우를 밝혔다. 용례로 목면(木棉)이 ‘무명’으로, 법랑(琺瑯)이 ‘파랑’으로, 백채(白菜)가 ‘배초’로 달라진 것 등이다.

정약용과 동시대의 학자인 문인 홍길주(洪吉周, 1786~1841)는 ≪아언각비≫에 대해 가치를 평가하면서도 몇 가지의 문제를 지적했다.(≪수여난필속(睡餘瀾筆續)≫(1842)) 가끔 지나치게 국한됨이 있는 점, 중국 문자의 사용이 옛날의 쓰임에서 바뀌어 잘못된 것을 논하면서 중국 사람이 잘못한 것은 두둔하고 조선의 것만 가혹하게 비판한 점, 음식이나 재화에 관련된 여러 글자들이 잘못된 이유는 대개 서리(書吏)들이 장부에서 복잡한 것을 꺼려 간편하게 사용했기 때문인데 견강부회하여 그 원인을 애써 찾은 점, 조선의 관직명이 중국과 다른 것까지도 모두 잘못이라 지적한 것에 대하여 중국의 관제 역시 변한 것이 많아서 그 명칭은 같지만 품계나 직무는 전혀 다른 것이 많이 있음을 밝히지 않고 조선의 것만 가혹하게 비판한 점 등을 비판하였다. 홍길주의 평가 가운데 긍정적인 측면의 언급을 보면, 한국의 풍속에서 친족의 촌수에 대하여 부르기 쉬운 점을 상세히 말하며 채택할 만한 것이 있음을 언급한 점이었다.
정약용의 어원 관련 저술은 영ㆍ정조 시대 실학자들의 저술과 비교하면 해설의 정확성과 자료 인용의 폭넓음에서 단연 뚜렷한 위치에 있다. 특히 ≪아언각비≫는 정약용이 가졌던 한국어 탐구에 대한 열망이 잘 나타난 저작물이다. 정약용이 지적한 한국어의 여러 문제점들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제기되는 올바른 표기와 용어 사용의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값진 저작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정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