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유표 經世遺表
정약용이 1817년에 저술한 개혁적 경세론. 신유옥사(辛酉獄事)에 연루되어 강진(康津)으로 유배된 정약용은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대한 경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관련된 연구와 저술을 1816년에 일단락 지은 뒤 경세학의 연구와 저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817년에는 고대 성왕(聖王)의 이상적 정치 체제를 담고 있는 ≪주례(周禮)≫에 근거하여 국가를 개혁하려는 의도를 담은 ≪경세유표≫를 저술하였다. 자신이 죽은 후에나 임금에게 바쳐지게 될 글이란 의미에서 제목에 “유표(遺表)”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정약용은 젊어서부터 경세론에 관해 많은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였다. 이는 ≪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책(策)ㆍ문(問)ㆍ의(議)ㆍ원(原)ㆍ론(論)ㆍ변(辨)에서 확인된다. 이들 개혁적 경세론들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깊이의 측면에서는 아직 단편적이고 정리되지 않은 발상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근원적 회의와 획기적 변화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의 다양한 경세론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특징이었다. 예를 들어 정약용은 통치권의 근원적 근거를 검토하여 민의에 위배되는 통치권은 혁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 탐구하였고, 토지 공유(共有)와 공산(共産)적 생산관계를 모색하였으며, 향리의 농단을 근원적으로 막을 제도를 구상하였다. 더 나아가 국가가 산업 기술의 발전을 제고, 관리하도록 하는 정책 등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의 개혁적 경세론의 수준을 결정적으로 고양시킨 계기는 유배 중의 오랜 경학 연구였다. <자찬묘지명>에서 정약용은 “처음에 내가 ≪역(易)≫을 연구하며 ≪예(禮)≫를 탐색하고 여러 경전에 미치어 가면서 매양 하나의 깨달음이 일어날 적마다 마치 신명(神明)이 묵묵히 깨우쳐 주는 듯하여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오랜 경학 연구에서 얻어낸 통찰 속에서 정약용은 소위 ‘조종(祖宗)의 법제’라는 것에 대하여 근본적 회의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경세유표≫의 서문에서 정약용은 “조종의 법제란 것은 대부분 창업(創業)의 시초에 마련한 것들이다. … 무릇 창업의 시초에는 법을 개혁하지 못하고 말세(末世)의 풍습을 그대로 따라 이를 떳떳한 법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그나마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이후로는 더더욱 문란해지게 되었다고 탄식하며 “터럭 한 끝에 이르기까지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에 와서 법제를 개혁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야 말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정약용은 정치적 문란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모두가 경전의 뜻을 밝혀 알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았다.”고 보았으며 “치국의 요체는 경전의 뜻을 밝히는 일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새로운 치세를 구현하고 이상적 정치인 ‘왕정(王政)’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성인(聖人)들의 본뜻을 집약하고 있는 고전에 근거한 근본적인 변법(變法)이 필수적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경세유표≫는 이러한 정약용의 생각에 기초하여 현실에서 왕정을 회복하고자 하는 변법적 국가개혁론이었다.
≪경세유표≫의 저술 취지는 그 서문에 잘 밝혀져 있는데, “관제(官制)ㆍ군현제(郡縣制)ㆍ전제(田制)ㆍ부역(賦役)ㆍ공시(貢市)ㆍ창저(倉儲)ㆍ군제(軍制)ㆍ과거제(科擧制)ㆍ해세(海稅)ㆍ상세(商稅)ㆍ마정(馬政)ㆍ선법(船法) 등 나라를 경영하는 모든 제도에 대해서 현재의 운용에 구애받음이 없이 기본 골격을 세우고 요목을 베풀어, 이를 가지고 우리 구방(舊邦)을 새롭게 해보겠다고 생각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정약용은 당시 현실의 국가 체제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법제를 근원적으로 개혁하여 ‘왕정’을 구현할 국가 체제 개혁론을 고안ㆍ제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경세유표≫의 서술 체제는 주(周)나라의 ‘왕정’을 확립시킨 주공(周公)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주례≫를 원형으로 삼았다. ≪경세유표≫는 <천관이조(天官吏曹)>에서 <동관공조(冬官工曹)>에 이르기까지 ≪주례≫에서 기원하는 “육전(六典)”의 체제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주례≫, <동관(冬官)>은 명칭만 남아 있을 뿐 내용은 일찍이 망실되었다. 한(漢) 대에는 ≪주례≫, <동관(冬官)>의 공백을 <고공기(考工記)>로 대신하였다. ≪주례≫에 바탕한 ≪경세유표≫도 마찬가지로 <동관공조(冬官工曹)>와 <추관형조(推官刑曹)>에 관해서는 직제 개혁의 원리와 조항만을 갖추었을 뿐, 그 구체적 운용에 관한 내용은 서술하지 않았다. 책의 이름도 원래는 ≪주례≫ 대신 ≪방례(邦禮)≫를 초한다고 하여 “방례초본(邦禮艸本)”이라고 하였으나, <자찬묘지명>을 지으면서 ≪경세유표≫로 고치고는 “다 끝맺지 못했다.[未卒業.]”고 밝혔다.
≪경세유표≫는 ≪주례≫를 기준으로 그 서술 체제를 삼았지만, 동시에 조선 후기의 현실을 배경으로 변법을 통한 이상적 정치 질서를 구현하려는 뚜렷한 목표를 지닌 저술이었다. 이러한 ≪경세유표≫의 성격은 그의 교육론과 산업 진흥책 - 특히나 외국의 선진 기술을 수용하고 장려하는 ‘이용감(利用監)’의 운용론 등에서 잘 드러난다.

≪경세유표≫는 원래 총48권이었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일본 교토대 토요(東洋)문고 소장본 등이 있는데, 이들은 총44권(전15책)의 체재로 편집되어 있다. 한편 미국의 버클리대 도서관 아사미문고에 소장된 필사본은 총46권(전15책)의 체재로 되어 있다.
1935~1938년에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활자본 ≪여유당전서≫를 간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경세유표≫는 총15권(전7책)으로 재편집, 간행되었다. 이 신조선사(新朝鮮社)본은 그 후 1960년 문헌편찬위원회에서, 1973년에는 경인문화사에서 영인ㆍ간행되어 현재 널리 보급되어 있다.
그리고 2012년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는 신조선사(新朝鮮社)본을 저본으로 하여 여러 대표적 필사본들과 대조하고 표점ㆍ교감한 ≪정본 여유당전서(定本 與猶堂全書)≫를 간행하였다.

제1권~제2권은 <천관이조(天官吏曹)>로부터 <동관공조(冬官工曹)>에 이르는 육조가 각기 관장할 정치ㆍ사회 개혁의 기본 원리와 소속된 각 관서의 담당 업무를 서술하였다. 특히 호조는 경제뿐 아니라 교육도 주관하도록 하며, 형조는 사회통합의 기능을 강화하도록 하고, 공조는 국가의 자원 관리와 이용후생의 기술을 수용ㆍ보급하는 기능을 강화하도록 고안하였다.
제3권~제4권은 <천관수제(天官修制)>이다. 수도(首都)를 재구획하고, 전국을 12성(省), 300여 군현(郡縣)으로 재조정하였으며, 관료의 치적을 고과하는 “고적법(考績法)”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제5권~제14권은 <지관수제(地官修制)>이다. 제5권~제9권에서는 정전제(井田制)의 원리와 그 시행 방법을 기술하였다. 제10권~제11권에서는 전조(田租)와 함께 국가의 양대 재원(財源)을 이루는 부공제(賦貢制)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제12권~제14권에서는 환곡ㆍ호적ㆍ해세(海稅)ㆍ어세(漁稅)ㆍ선세(船稅) 등에 관한 개혁론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제15권에서는 과거(科擧) 제도 및 진보제(鎭堡制)에 대한 개혁론을 펼쳤다.

≪경세유표≫의 내용상 특징으로는,


첫째, 새로운 객관적 기준에 따른 국가체제의 정립을 고안하였다.
≪경세유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정전제론이다. ‘정전제’는 수리(數理)에 바탕한 명백하고 객관적 기준을 세워 시행하고자 한 개혁론이었다. 정약용은 경지의 등급에 따라 실적이 달라지는 '결부법’ 을 개정하여 절대 면적을 파악하는 ‘경묘법’ 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였다. 수리에 바탕을 둔 전국 일률의 10진법 도량형 제도, 전국 일률의 9등급 화폐ㆍ수레ㆍ선박 제도의 제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째, 국가적 차원의 분업 정책을 제안하였다.
≪경세유표≫에서 국가는 정전제를 바탕으로 전국 호구를 철저히 파악한 위에 모든 주민을 9직(職)으로 분담시켜 만민이 각자의 직무에 분업적으로 전업(專業)토록 하였다. 9직은 국가 차원의 분업적 협업을 통해 각기 자영적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기능과 기술을 발전시켜 스스로 풍족해지는 동시에 국부도 증대하도록 편성, 배치된 것이었다. 또한 정전제론은 조세(租稅)와 부렴(賦斂)을 바로잡음으로써 국가재정을 항구적으로 충실하게 한다는 고안이기도 했다. 셋째, 왕권 중심의 제도적 통치론을 들 수 있다.
≪경세유표≫에서 정약용은 중앙의 벌열로부터 지방 향리들에 이르기까지 유력층에 의해 자행되는 중층적이고 다극적인 중간 농단의 행태를 극복하고, 통치권을 왕권으로 집중할 것을 강조하였다. ≪경세유표≫는 개혁적인 법제에 근거하여 엄정하고 강대한 왕권을 확립하고, 이를 통해 ‘왕정’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정약용은 이익(李瀷, 1681~1763, 호:星湖)을 사숙하면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에서 출발하였지만, 후에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풍까지 종합하고 학문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하기에 이르렀다. ≪경세유표≫는 정약용의 수준 높은 경학 연구를 기초로 저술된 것으로 경세론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수준을 대표하고 있다. 나아가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정약용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다. 요컨대 ≪경세유표≫는 한국 전근대 국가론의 최후 단계를 반영하고 있는 불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김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