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서고존 樂書孤存
진한(秦漢) 이후 음악과 관련된 그릇된 설들이 난무했던 이유가 ≪악경(樂經)≫의 소실 때문이라 진단하여 ≪악경≫을 복원하고 고악(古樂)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1816년 저술한 책.
≪악서고존≫은 정약용이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던 시절에 쓰여졌다. 1816년(순조 16) 봄, 정약용이 55세 되는 해에 책이 완성되었는데 서문은 그로부터 두 해 후인 1818년(순조 18)에 쓰여졌다. ≪악서고존≫이 저술되던 무렵, 정약용은 풍증으로 인하여 글쓰기가 어려워진 때였으므로 그의 제자 이청(李𤲟 = 李鶴來, 1792~1861, 호:靑田)에게 그 내용을 받아 적게 하고 김종(金碂, ?~?)에게 주어 탈고하도록 하여 완성되었다.
정약용이 ≪악서고존≫을 쓴 것은 소실된 ≪악경≫의 진면목을 갖추고자 함이었다. 정약용의 이러한 생각은 ≪악경≫이란 책이 본래 별도로 있었다고 보는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다. 정약용은 ≪악경≫이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소실되었는데 오직 <하남주가성곡절(河南周歌聲曲折)> 7편과 <주가요시성곡절(周歌謠詩聲曲折)> 75편만이 ≪한서ㆍ예문지(漢書藝文志)≫에 실려 있었으나 이마저도 곧 없어졌고, 이후 어지러운 설들이 난무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다른 경전에서 산발적으로 보이는 자료는 오직 <우서(虞書)> 몇 군데와 ≪주례(周禮)≫의 5, 6절 정도뿐이라서 고악을 배우고자 해도 의거할 데가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신이 ≪악서고존≫을 저술하는 것은 소실된 ≪악경≫을 복원한다는 의미이고, 어지러운 사설(邪說)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고악(古樂)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면밀한 연구를 통해 여러 설들을 논하고, 반박하고, 조사하여 고정(考訂)하는 것이 곧 자신의 저술에서 이루어내야 할 일이라 생각하여 ≪악서고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특히 악률(樂律)과 관련된 이론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여러 설들이 제시되었는데, 율을 불어 소리를 정한다는 취율정성(吹律定聲) 이론을 비롯하여 삼분손익(三分損益), 취처생자(取妻生子), 배괘배월(配卦配月) 등의 다양한 이론들이 제기되었지만 그와 같은 이론으로는 악기를 타지도, 불지도 못하니 쓸모없는 것이라 하였다. 따라서 진한(秦漢) 이후의 여러 사설들은 “빗자루로 한 번에 깨끗이 쓸어버려야 옛 법에 어느 정도 가까운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시경≫ㆍ≪서경≫ㆍ≪맹자≫ㆍ≪의례≫ㆍ≪주례≫ㆍ≪국어(國語)≫, <주어(周語)> 등에 겨우 남아 눈에 띠지 않는 몇몇 구절을 뽑고 모아서 부연 설명하여 12권의 ≪악서고존≫을 만든 것이라 하였다. ‘고존(孤存)’이라는 말은 “많으면서 망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제대로 보존되는 것이 낫다.”는 뜻이라 하였다.
정약용은 ≪악서고존≫을 저술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십이율려(十二律呂)를 산출하는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과는 다른 ‘율려차등(律呂差等)’의 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이는 그의 둘째 형인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과의 서신교환을 통한 결과이다. 정약전은 1801년(순조 1)의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흑산도(黑山島)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편지로써 자주 안부를 물었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술이 이루어질 때마다 보내서 읽도록 하였고 그에 대해 정약전은 일정한 평을 해 주었다. 특히 ≪악서고존≫의 율려산출 이론에서 정약용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삼천양지(參天兩地: 하늘은 양획의 길이, 즉 3으로 상징되고, 땅은 음획의 길이, 즉 2로 상징된다.)”설은 정약용에게 막혀 있던 율려산출 이론에 대해 길을 열어준 조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그간 알려져 있던 악학이론에서 가장 논란이 많고 해석에 견강부회가 있는 내용들, 혹은 반드시 수정해야 하는 내용, 논박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 상세히 조사해야 하는 내용 등에 대해 경전과 사서 등의 주석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논증, 서술하는 방식을 취해 ≪악서고존≫을 12권을 저술하였다.
≪악서고존≫은 현재 3종의 이본이 있다. 1936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활자본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 한 질, 그리고 미국 버클리대 도서관 아사미문고에 소장된 3종이다. 활자본은 ≪여유당전서≫ 제4집 악집의 제1권부터 제4권에 걸쳐 수록되어 있고 필사본은 12권 4책으로 되어 있다.
≪악서고존≫은 ‘논(論)’ ‘변(辨)’ ‘박(駁)’ ‘사(査)’ ‘정(訂)’의 다섯 가지 서술 방식을 취해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논(論)’이란 어떤 설에 대해 논증하는 것으로 여러 경전에 나오는 악학관련 내용 가운데 논증이 필요한 기록을 제시한 후 이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논하는 방식이다. ‘변(辨)’이란 변석(辨析)하는 것으로서, 잘못된 내용에 대해 분변하여 밝히는 방식이다. ‘박(駁)’이란 잘못된 이론을 반박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특히 청(靑) 대의 학자 모기령(毛奇齡, 1623~1716, 호:西河)의 이론에 대해 반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사(査)’란 제대로 된 이론을 제시하기 위해 여러 경전을 통해 율려(律呂)의 본법을 비롯한 악학 이론을 조사, 심사하는 것이며 ‘정(訂)’이란 잘못된 이론을 바로잡는 것이다. 전체 12권에서 이와 같은 ‘논’ ‘변’ ‘박’ ‘사’ ‘정’의 방식으로 76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했는데, 논 11항목(제1권~제2권), 변 24항목(제2권~제5권), 박 13항목(제6권), 사 15항목(제7권~제11권), 정 13항목(제11권~제12권)으로서 ‘변’하는 내용이 가장 많은 항목을 차지하고 있다.
제1권에서는 육률(六律)과 오성(五聲)이 같지 않은 것, 육률은 본래 종성(鐘聲)에서 나온 것, 악기를 만드는 여덟 가지 재료인 금(金)ㆍ석(石)ㆍ사(絲)ㆍ죽(竹)ㆍ포(匏)ㆍ토(土)ㆍ혁(革)ㆍ목(木)의 팔음(八音)으로 만든 여러 악기들이 모두 십이율을 갖추고 있다는 것, 육률의 관은 잡을 수는 있으나 불 수는 없다는 것, 구하(九夏)의 금주(金奏)와 아(雅)ㆍ송(頌)의 시가(詩歌)가 각각 한 짝을 이루어 율려에 합치 되는 것, 육률이 경(經)이 되고 오성이 위(緯)가 되는 것, 동지와 하지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별도의 회제지법(禬除之法), 즉 푸닥거리라는 것 등에 대한 내용을 논증하였다.
제2권에서는 십이율의 명의(名義), 십이율의 차등, 칠음(七音)과 한 옥타브 위의 네 음인 사청성(四淸聲)이 일어나는 것 등에 대해 여러 경전의 내용을 통해 논증하였고, 이어 율을 불어서 오음(五音)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갈대의 재로 관을 묻고 후기(候氣)로 율을 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 기장으로 율을 정하는 것은 본래 불합리하다는 것, 율을 불어서 소리를 낸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 등에 대한 내용을 변석하였다.
제3권에서는 십이율을 월기(月氣)에 배합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 십이율을 건(乾)ㆍ곤(坤) 육효(六爻)에 배합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 십이율을 산출할 때 삼분손익법에 의해 위아래로 상생(相生)하는 법이 ≪관자(管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십이율은 위아래로 상생하는 법이 없다는 것, 율서의 종분지법(鍾分之法)이 십이율관의 실수가 될 수 없다는 것, 십이율의 촌수(寸數)에 관한 여러 설이 같지 않아서 논거로 삼을 수가 없다는 것, 십이율은 취처생자지법(娶妻生子之法)이 없다는 것 등에 대한 내용을 변석하였다.
제4권에서는 십이율의 격팔상생(隔八相生)하는 설과 상생(上生), 하생(下生)하는 설이 합치하지 않는다는 것, 십이율의 환궁(還宮)하는 법은 ≪주례≫와 어긋나 쓸 수 없다는 것, 두 개의 변성(變聲)이 삼분손익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 경방(京房, 기원전 77 ~ 기원전 33, 자:君明)의 십이율(六十律)의 오류, 전낙지(錢樂之, ?~?, 남조(南朝) 시기 활동)의 삼백률(三百律)과 만보상(萬寶常, ?~595?, 수(隋) 대 활동)의 천팔성(千八聲)이 모두 선궁지법(旋宮之法)에서 나왔다는 것, 십이율은 반성(半聲)과 변반성(變半聲)의 쓰임이 없다는 것 등의 내용에 대해 변석하였다.
제5권에서는 사청성이 오성(五聲)의 청성이 되는 것은 불가하고 십이율의 청성이 된다는 것, 환궁지법의 문제점, 경방이 세운 이론이 율가(律家)의 이단이라는 것, 한(漢)나라 명제(明帝, 재위 226∼239)의 음악인 대여악(大予樂)의 문제, 양무제(梁武帝, 재위 502~549)의 사통(四通)의 제도가 경방 이론의 변법(變法)이라는 것, 왕박(王朴, 915~959)의 이론은 양무제의 사통의 제도의 유법(遺法)이라는 것, 소지파(蘇祗婆, ?~?, 後周 시기 활동)의 칠조(七調)에 관한 이론 등의 내용에 대해 변석하였다.
제6권에서는 십이율관의 둘레[圍]는 구푼(九分)이라는 것, 두 개의 변성과 사청성을 모두 쓰는 법, 유빈음(蕤賓音) 이상은 오성의 이변(二變)이 된다는 것, 공척보(工尺譜)로 고악(古樂)을 정하는 것 등 모기령이 제시한 여타 이론에 대해 논박하였다. 이상 제1권부터 제6권까지에서는 주로 논증과 변석, 논박 등 여러 경전과 사서(史書) 등에 나오는 악학이론의 문제점을 드러내 놓고 그에 대해 논증과 변석, 혹은 논박의 방식으로 서술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제7권부터 제12권에서는 율려의 본법을 조사하고 고정, 수정함으로써 악학의 참된 원리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제7권에서는 율에 삼기육평(三紀六平)이 있다는 것, 육률(六律)은 모두 삼분손일하여 각각 하나씩의 음려(陰呂)를 산출한다는 것, 오성(五聲)은 각각 9의 차이가 있다는 것, 십이율의 궁은 모두 81푼이라는 것 등 율려의 본법을 조사함으로써 옳은 이론과 원리를 찾고자 하였다. 제8권에서는 십이율이 종(鍾)의 제도라는 점을 조사하였고 권9에서는 12편종(編鐘)의 제도, 12편경(編磬)의 제도, 훈(塤)의 제도, 고(鼓)의 제도에 대하여, 제10권에서는 금(琴)과 슬(瑟)의 제도를 조사하였다.
제11권에서는 생(笙)과 소(簫), 적(笛)의 제도에 대해 조사하였으며, 팔음(八音)을 팔괘(八卦)와 배합할 수 없다는 것, 오성은 오행(五行)과 배합할 수 없다는 것, 또 오성은 군(君)ㆍ신(臣)ㆍ민(民)ㆍ사(事)ㆍ물(物)과 짝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소, 양, 꿩, 돼지의 울음소리로 오성을 모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 자음을 오성과 배합할 수 없다는 것 등의 내용에 대해 고정하였다. 제12권에서는 오성을 구별하는 것은 팔음 중에 사(絲)ㆍ죽(竹)ㆍ금(金)ㆍ석(石)의 네 가지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 악기의 경우 의논할 것이 없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현악기의 휘(徽), 관악기의 지공(指孔), 종과 경을 칠 때 각퇴(角槌)의 크기와 치는 위치에 따라 오성을 구분한다는 것, 오성은 각각 하나의 오성을 갖추고 있다는 등의 내용을 고정하였다. 가장 끝부분은 일무에 대해 논의한 ‘무의(舞義)’와 ≪서경(書經)≫, <익직(益稷)>의 ‘납언(納言)’에 관한 내용을 논의한 ‘납언의(納言義)’로서 이 부분에 대해 해석한 매색(梅賾 = 梅頤, 枚賾, ?~?, 동진 시기 활동)과 채침(蔡沈, 1167~1230)의 설을 부정하거나 유보하고 정약용의 독자적 해석을 전개하였다.
정약용이 ≪악서고존≫을 지은 것은 진시황(秦始皇, 재위 기원전 247 ~ 기원전 210)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 ≪악경≫이 소실되자 고악이 없어지고 성인의 도(道) 또한 어두워졌으므로 그 이론에 대해 변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나 더 큰 구도로 본다면 ‘육경(六經)의 회복’에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정약용은 여러 사설(邪說)들이 난무하는 현실이 곧 삼대(三代) 이후 음악이 망실되었기 때문이고, 훌륭한 정치, 좋은 풍속이 없는 것 또한 음악이 망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추연(鄒衍, 기원전 305 ~ 기원전 240 사이 추정),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92? ~ 기원전 235)나 경방, 전낙지, 만보상, 소지파(蘇祗婆, ?~?, 후주(後周) 시기 활동), 왕박 등이 제기한 이론은 고악(古樂)의 부재에서 나올 수 있는 삿된 이론[邪論]들이며 성인이 제정한 음악의 근본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고악의 흔적이 있는 몇몇 자료를 모으고, 정약용 자신의 독자적 해석을 곁들여 사라진 ≪악경≫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하여 저술한 것이 ≪악서고존≫이었으며, 이를 통해 고악과 고악의 정신을 회복하여 교화의 핵심적 수단인 악(樂)의 근본을 되찾고자 하였다.
(송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