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공의 大學公義

≪대학(大學)≫에 대한 정약용의 체계적인 해석서.

유배지에서 경학 전반에 대한 주석을 새롭게 정립해 가는 가운데 정약용은 ≪대학≫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주희(朱熹, 1130~1200, 호:晦庵)의 ≪대학≫에 대한 견해와 자신의 견해 차이를 분명히 하였다. 정약용의 ≪대학강의(大學講義)≫가 ≪대학≫의 일부분에 대한 불완전한 해석이라면 ≪대학공의≫는 ≪대학≫에 대한 정약용의 성숙하고 정합적인 해석 체계를 보여주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경학을 연구하고 정리하였다. 52세에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완성하고 53세에는 ≪중용자잠(中庸自箴)≫,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맹자요의(孟子要義)≫와 함께 ≪대학공의≫도 저술하여 사서(四書)에 대한 연구를 마무리 지었다. 이로써 정약용은 주희의 사서 해석체계를 회의적 시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대안적 해석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활자본은 1936년에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 제2집, 경집 제1권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1책 3권의 필사본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대학≫ 증자(曾子) 저작설에 대한 비판

주희는 증자(曾子, 기원전 505 ~ 기원전435)가 ≪대학≫의 ‘경(經)' 1장을 짓고 증자의 문인이 ‘전(傳)' 10장을 지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약용은 근거가 없는 억측이라고 비판하였다. 주희에 의하면 공자(孔子 = 丘, 기원전 551 ~ 기원전 479, 자:仲尼)의 도통이 증자에게 전수되었고, 다시 자사(子思, 기원전 483 ~ 기원전 402 추정)ㆍ맹자(孟子, 기원전 372 ~ 기원전 289 추정)로 이어졌다. 그런데 자사와 맹자는 저서가 있는데 증자만이 없었으므로 주희는 증자에게 ≪대학≫을 지은 공을 돌려서 도통의 맥락을 이으려했다고 정약용은 설명하였다.

≪대학≫단행본에 대한 입장과 고본(古本) ≪대학≫의 선호

정약용은 당(唐) 대나 송(宋) 인종(仁宗, 재위 1022~1063) 때부터 ≪대학≫이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고 보는 설에 대해서 부정했다. ≪대학≫의 표장(表章)은 정자(程子)가 하였으며, ≪대학≫이 사서(四書)에 들어온 것은 원(元) 인종(仁宗, 재위 1311~1320) 때부터 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대학≫을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분류하는 주희의 ≪대학장구≫ 체계를 따르지 않고, 고본 ≪대학≫의 체계를 수용하고 있으며, ≪대학≫ 전체를 27절로 나누어서 해석하였다.

정치학서로서의 ≪대학≫ 이해

정약용은 ≪대학≫이 대인(大人) 일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대 태학에서 ‘주자(胄子: 천자의 적자와 서자, 3공과 제후 등의 적자)’를 가르치던 내용이라고 해석했다. 즉 ≪대학≫의 도는 장차 나라를 맡아 정치를 할 위정자의 자제를 교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주로 다루는 내용이 ‘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에 관한 것이어서 ‘치국’ㆍ‘평천하’ 양절에 이르러서는 그 절목이 자세하고, 그 위에 나온 몇 절은 대강대강 제시하고 자세히 논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정약용은 ≪대학≫이라는 텍스트가 본래는 사대부 일반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차 국정을 맡아볼 정치 지도자를 위한 정치학서라고 이해하였다.

주희의 ≪대학≫ 이해와의 차이

주희는 ≪대학≫에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설명 부분이 망실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보망장(補亡章)” 을 저술하였다. 이후에 이 부분은 ≪대학≫ 해석을 둘러싸고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특히 왕수인(王守仁, 1472~1528, 호:陽明)은 주희의 ≪대학장구≫를 비판하면서 고본 ≪대학≫을 옹호하고, ‘치지(致知)’를 ‘치양지(致良知)’로 이해하였으며, 주희가 ‘친민(親民: 백성을 친하게 대함)’을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함)’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고 이해한 것을 비판하여 원래대로 ‘친민’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대학공의≫에서 정약용 역시 왕수인처럼 주희의 ≪대학≫ 해석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였다.

‘명덕(明德)’ 개념

주희는 ‘명덕(明德)’을 “사람이 하늘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허령불매(虛靈不昧)하여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대응하는 것”으로 설명하여 마음[心]이나 본성[性] 개념과 관련시킨 반면 정약용은 명덕이란 ‘효(孝: 효성스러움)ㆍ제(弟: 공손함)ㆍ자(慈: 자애로움)’의 윤리적 덕목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주희가 주관적ㆍ인식론적 관점에서 명덕을 이해하는 데 반해 정약용은 실천윤리적ㆍ정치학적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명덕을 ‘효(孝)ㆍ제(弟)ㆍ자(慈)’ 세 가지 개념으로 제시한 이유는 정약용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주례(周禮)≫에서 대사악(大司樂)이 “여섯 가지 덕[六德]” , 즉 중(中)ㆍ화(和)ㆍ지(祗)ㆍ용(庸)ㆍ효(孝)ㆍ우(友)로 국자(國子)를 가르친다고 했는데, 육덕 가운데 중ㆍ화ㆍ지ㆍ용은 ≪중용≫의 가르침이고, 효ㆍ우는 ≪대학≫의 가르침인데 이것이 곧 명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상서≫, <요전(堯典)>에 나오는 ‘오전(五典)’과 ‘오교(五敎)’는 부의(父義)ㆍ모자(母慈)ㆍ형우(兄友)ㆍ제공(弟恭)ㆍ자효(子孝)를 가리켰다. 그런데 형우(兄友)와 제공(弟恭)을 합치면 제(弟)가 되고, 부의(父義)와 모자(母慈)를 합치면 자(慈)가 되어서 ‘효ㆍ제ㆍ자’가 오교(五敎)를 총괄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대학≫에서 말하는 ‘효ㆍ제ㆍ자’는 단순히 자기 부모, 형제, 자식에 대한 ‘효ㆍ제ㆍ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도자가 효제의 덕을 장려함으로써 민중들에게 효제의 기풍을 일으키고, 어려운 민중을 사랑함으로써 민중이 복종하게 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하였다. 정약용이 ≪대학≫을 ‘효ㆍ제ㆍ자’의 덕목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가 30세 때 내각 월과(月課)에서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가 내린 대학 책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이미 나타났다.

“마음에는 본래 덕이 없다.[心本無德.]”

명덕을 ‘효ㆍ제ㆍ자’로 보는 정약용은 또한 “마음에는 본래 덕이 없다.[心本無德.]“고 주장했다. 주자학(朱子學)은 인간에게 사덕(四德: 인의예지)이 본래 주어졌다고 보는 데 반해서 정약용은 인간의 마음에는 선험적으로 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性)에 따라 실천을 통해 덕은 후천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친민(親民)’

‘친민’의 ‘친(親)’을 ‘신(新)’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정자(程子)와 주희의 견해에 정약용은 동의하지 않고, 그대로 ‘친민’이 옳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에 따르면 명덕은 ‘효ㆍ제ㆍ자’를 뜻하므로 ‘효ㆍ제ㆍ자’가 밝혀지면 그 결과로 백성들이 서로 불화하지 않고 화목하고 친애하게 된다는 의미로 ‘친민’은 해석되었다.

‘격물치지(格物致知)’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해서도 정약용은 주희와 달리 ‘격물(格物)’의 ‘격’은 헤아린다[量度]는 뜻으로, 물(物)은 의(意)ㆍ심(心)ㆍ신(身)ㆍ가(家)ㆍ국(國)ㆍ천하(天下)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격물이란 물(物: 의ㆍ심ㆍ신ㆍ가ㆍ국ㆍ천하)의 근본[本]과 말단[末]을 헤아리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치지란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의 순위를 극진히 아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정약용에 의하면 불교의 마음 다스리는 법은 마음 다스리는 것으로 사업을 삼지만, 유가에서 마음 다스리는 법은 사업을 통해 마음을 다스린다고 말했다. 유가의 마음 다스리는 법은 불교처럼 벽을 마주하고 마음을 관조하여 허명한 마음의 본체를 단속하여 맑게 하나의 티끌도 오염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유가에서는 일을 매개로 하여 뜻을 진실되게 하고, 일을 매개로 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의(誠意)’와 ‘정심(正心)’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은 항상 행사(行事)와 연관하여 인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또한 정자(程子)의 입장, 즉 ≪대학≫의 ‘친민’의 ‘친(親)’을 ‘신(新)’으로 고쳐야 할 뿐만 아니라, “신유소분치(身有所忿懥: 몸에 분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의 ‘신(身)’을 ‘심(心)’으로, “견현이불능거, 거이불능선, 명야(見賢而不能擧, 擧而不能先, 命也.: 현명한 이를 보고도 쓰지 못하며, 쓰더라도 앞서서 할 수 없는 것을 명이라고 한다.)”의 ‘명(命)’을 ‘태(怠: 태만함)’로 고쳐야 한다고 보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대체로 고본 ≪대학≫의 내용을 그대로 신뢰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용인(用人)’과 ‘이재(理財)’의 중시

나라를 다스리는 데 가장 주요한 두 가지는 ‘용인(用人: 인재를 운용하는 것)”과 ‘이재(理財: 물질적 재화를 경영하는 것)”라고 정약용은 인식하였다. 귀한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하고, 일반 서민들은 재물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정치의 요체(要體)는 지배층들을 위해서는 현명한 사람을 가려서 등용해야 하고, 서민을 위해서는 세금을 거둘 때 합리적으로 해서 불만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대학공의≫에 영향을 준 선행 연구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중국경학자들의 학설을 폭넓게 인용함은 물론이고, 윤휴(尹鑴, 1617~1680, 호:白湖)를 비롯한 조선 학자들의 경설도 인용하여 조선 경학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였다. 특히 성호학파(星湖學派)에 속하는 권철신(權哲身, 1736~1801, 호:鹿庵)의 ‘명덕’과 ‘격물치지’에 대한 학설이 정약용의 생각과 같은 것으로 보아 ≪대학공의≫에는 권철신을 비롯한 성호학파 학자들의 영향도 일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주자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대학장구≫의 핵심 내용을 부정하고 새로운 실천적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독자적 경학을 정립하는 기반을 형성하였다.

(장승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