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고금주 論語古今註
≪논어(論語)≫에 대한 고금의 주석을 종합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정약용 자신의 견해를 나타낸 저서.
정약용은 한(漢)나라 위(魏)나라로부터 명(明)나라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논어≫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주석들을 수집ㆍ고찰하여 좋은 것은 절록(節錄)하고 반대하는 주석에 대해서는 논평ㆍ단정하였다. 그중에서도 기존의 해석들이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석을 제출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중이던 1813년 겨울, 제자인 이강회(李綱會, 1789~?, 호:擊磬子)와 윤종심(尹鍾心 =윤동(尹峒), 1793~1853)의 도움을 받아 총 40권 분량의 대작을 완성하였다.
정약용은 사서(四書) 중 오직 ≪논어≫만이 종신토록 읽을 만하며 ≪논어≫를 가장 먼저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논어≫ 주석 작업에 착수하지 못하는 것은 송(宋) 이후 사서의 뜻이 모두 궁구되어 더 밝힐 것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사서를 연구하면서 간혹 자신이 새로운 뜻을 얻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미 전에 누군가 미리 제시한 지 오래된 학설임을 알게 되기도 하였고, 선배들이 선유(先儒)의 잘못된 해설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이에 정약용은 ≪논어≫에 관한 천고(千古)의 다양한 주석 중 잘된 것을 취합하여 ‘집해(集解)’나 ‘집주(集註)’의 형식으로 저술을 하겠다는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약용은 과거 공부에서 돌아와 경학과 예학에 힘쓰던 이강회를 가르치는 것을 기회로 ≪논어≫의 주석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판본
≪논어고금주≫의 대표적 판본으로는, 1936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 수록본(제2집 경집, 제7권~제16권),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필사본, 奎11894, 제58권~제70권), 오사카(大阪) 부립도서관 소장본(필사본, 甲和444) 세 가지가 있다. 오사카 부립도서관 소장본(필사본)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필사본)은 동일 계열의 판본으로 보이는데, 체제의 측면에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필사본)이 더 원본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필사본)에서 ≪사암선생연보≫와 <자찬묘지명>에서 기록된 사실과 부합되는 기술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
≪논어고금주≫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논어고금주≫ 본문으로서 처음에 <원의총괄(原義總括)> 175칙(則)이 부가되어 있다. 이 <원의총괄>은 정약용이 기존의 해석과 달리하는 부분으로 ≪논어고금주≫의 특색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이 부분이 ‘다산주(茶山注)’라고 불러야 할 부분이다. 이 밖에도 도처에서 기존의 해석과 다른 정약용의 의견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부분은 부록에 해당하는 것으로, <논어대책>이 12개(실제로는 21개) 조목으로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가 질문하고 정약용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는 1791년 내각일과로서 이루어진 것으로 정약용 ≪논어≫ 연구의 서장(序章)에 해당한다.
셋째 부분은 <춘추성언수(春秋聖言蒐)>라 하여 ≪춘추≫ 3전과 ≪국어≫에 실린 공자(孔子 = 丘, 기원전 551 ~ 기원전 479, 자:仲尼)의 말을 수집한 것이 1편을 이루고 있다. 이는 총 63장으로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46장, ≪공양전≫ 4장, ≪곡량전≫ 5장, ≪국어≫(노어魯語) 8장이 실려 있다.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특히 ‘인(仁)’, ‘서(恕)’, ‘성(性)’의 개념을 강조하고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① 인(仁): 정약용은 인(仁)은 다른 사람에게 향한 사랑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사람과 사람이 그 도를 다하는 것, 그 본분을 극진히 하는 것으로 보고, 이를 인륜의 완성된 덕이라고 파악했다. 정약용은 인은 결코 ‘심덕(心德)’이나 ‘천리(天理)’가 아니고 ‘인덕(人德)’이라 규정하였으며, 인은 ‘행사(行事: 실천)’에서 이루어지며 결코 마음에 있는 ‘리(理)’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② 충(忠): 정약용은 ‘중심(中心)’으로 남을 섬기는 것을 ‘충(忠)’,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리는 것을 ‘서’라고 하였다. 공자가 자신의 도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다고 말했을 때의 ‘일(一)’은 바로 ‘서’이며 근본이 되고 실행하는 것은 ‘충’이 되어서, ‘서’와 ‘충’은 서로 대립되지 않고 ‘충’을 실행할 때 ‘서’는 이미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서’를 상하ㆍ전후ㆍ좌우의 교제를 잘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이를 “혈구지도(絜矩之道: 자신의 마음을 기준으로 남의 마음도 헤아리는 방법)”와 연결시켰다. 즉 공자의 도는 ‘혈구지도’이기도 하며 ‘일이관지’는 바로 ‘혈구지서(絜矩之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③ 성(性): 정약용은 ‘성(性)’을 “기호(嗜好)”로서 파악하고 이를 “형구지기호(形軀之嗜好: 육체적 기호)”와 “영지지기호(靈知之嗜好: 정신적 기호)”로 분류했다. 공자가 “성상근(性相近: 인간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다)”이라고 말한 것은 지혜로운 사람과 우매한 사람[上智下愚] 모두에 관하여 말한 것이며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상ㆍ중ㆍ하 세 가지 등급으로 나눌 수 없다고 보았다. ‘지혜로운 사람[上智]’과 ‘우매한 사람[下愚]’의 구분은 모신(謀身)의 뛰어남과 그렇지 못함[工拙]을 가리키는 것이지 타고난 본성의 높고 낮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불이(不移)’는 남에게 옮긴 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 자리에 굳게 앉아 옮기지 않음을 이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논어고금주≫는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① 체계의 방대함: ≪논어고금주≫는 권수가 40권(13책)이나 되는데 이는 정약용의 육경과 사서에 대한 저서들 중 가장 방대한 것이며, 500여권의 저서 중에서 세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
② 인용문헌의 다양함: 이는 주로 인증 형식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러 경서를 비롯하여 사서류(史書類), 자부류(子部類) 심지어는 집부류(集部類)의 문헌들까지 인용하여 ≪논어≫ 원문의 해석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③ 다양한 해석 방법: ≪논어≫해석에 정약용이 사용한 대표적인 방법으로 질의법(質疑法), 인증법(引證法), 고이법(考異法), 사실법, 성조법(聲調法)과 음독법(音讀法) 등이 있다.
④ 독특한 분장분절 방식의 채택: 정약용은 ≪논어고금주≫에서 주자의 ≪논어집주≫와 달리 1장을 분절하지 않고 1장 전체를 종합적으로 통관하려고 하였다.
⑤ ≪논어≫원형 회복 노력: 이는 특히 ‘고이(考異)’ 부분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 정약용은 한 대의 ≪석경(石經)≫, 정현(鄭玄, 127~200, 자:康成)의 ≪논어주≫는 물론 심지어는 당시 조선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양(梁)나라 황간(皇侃, 488∼545)의 ≪논어의소(論語義疏)≫까지 참고하여 원형의 회복에 노력하였다.
⑥ 실증의 중시: 고전을 인용하여 증거를 드는 것은 물론 실제적인 사실을 예로 들어 증거로 삼고 있다. 이에는 실사(實事), 고사(故事), 가사(假事) 등의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또한 주자학(朱子學)의 공리공담에 대한 반성의 태도로서 실천을 중시하고 있다.
⑦ 한송겸채(漢宋兼採)의 정신: 정약용은 고증학의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결점도 지적하고 성리학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경전연구에 있어서 훈고학과 성리학은 그중 어느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⑧ 조선 및 일본의 학설에 대한 광범위한 채택: 이는 이전의 경서주석에서는 보기 드문 특징으로 정약용은 주위의 선배들(權哲身, 李森煥, 李秉休, 丁若銓)의 학설들을 논거로 채택하였으며,
일본인 학자로는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 오규 나베마쓰(荻生雙松, 1666~1728, 호:소라이(徂徠)), 다자이 쥰(太宰純, 1680~1747, 호:슌다이(春臺))의 학설을 인용하였다. 정약용은
중국의 전고(典故)만을 인용하고 조선의 전고를 멸시하는 것은 잘못된 풍조라고 개탄하였다.
⑨ 이경증경(以經證經)의 정신: 이는 경서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바로 그 경서의 내용을 증거로 삼아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정약용의 모든 경서주석의 밑바탕에는 이 정신이 깔려 있다.
⑩ 자의(字義)의 중시: 정약용은 경서를 해석하는 법은 자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하고 먼저 글자를 만든 원의를 안 뒤에야 본지를 얻을 수 있다고도 하여 먼저 원의를 아는 것을 경전해석의 시발점으로 보았다.
정약용은 그의 전 학문 역정을 통해 ≪논어≫연구와 관련된 일련의 체계적 발전을 이루었다. 즉 초년의 <논어대책>이 서장(序章)을, 중년의 ≪논어고금주≫는 중장(中章)을, 말년의 <자찬묘지명> 중 ≪논어≫ 에 관한 서술 부분이 종장(終章)을 이루어, 일련의 완결된 체계를 이루었다.
≪논어고금주≫는 경학사적으로는 그 집대성적 성격, 해석의 독창성 때문에 그 의의가 인정될 수 있다. 정약용은 경학과 경세학을 연속선상에서 파악하였으며, 기존의 ≪대학≫ㆍ≪중용(中庸)≫ 중심의 학문적 풍토에서 ≪논어≫ 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는 점에서도 경학사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또한 ≪논어고금주≫는 ‘수사지구관(洙泗之舊觀: 원시유학의 관점)’의 회복을 역설하며 주자학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였다는 점에서 (유학)사상사적 의의를 가진다. 더불어 ‘권형(權衡)’ 등의 개념을 통해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평등의식 역시 강조하여 조선 후기 실학에 이론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도 그 사상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밖에도 정약용은 ≪논어≫의 정신에 맞추어 전체적으로 평이하면서도 명확하게 해석하려 하였으며, 합리적인 해석을 통해 객관성의 유지에도 힘을 기울였다.
≪논어고금주≫는 한ㆍ중ㆍ일 고금의 주석을 바탕으로 공문(孔門: 유학)의 원의(原義)를 중심으로 자신의 새로운 견해를 비판적으로 제시한 획기적인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논어고금주≫는 논어학사는 물론 경학사 전체에 있어서도 특기할 만한 집대성적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김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