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고징 春秋考徵
정약용이 ≪춘추(春秋)≫에서 오례(五禮)를 고증하여 설명한 예서(禮書).
≪춘추≫에서 선왕(先王)의 전례(典禮)인 ≪주례(周禮)≫를 고증하여 길례(吉禮)와 흉례(凶禮)를 중심으로 한 오례(五禮)의 중요한 주제를 ‘이경증경(以經證經: 경전으로 경전을 고증함)’의 방법으로 정리한 작품이다. 정약용의 춘추학(春秋學)을 대표하는 경학(經學) 저술이지만, “고징(考徵)”이라는 표현이 잘 보여주듯이 저술 의도는 ≪춘추≫가 아니라 예(禮)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예학(禮學) 저술이다.
정약용은 ≪춘추≫를 통해서 전례의 원형을 탐색하고 경전적 이상과 괴리되어 왔던 역대 전례와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춘추고징≫을 저술했다.
<춘추고징서(春秋考徵序)>에 의하면, 초본(草本)은 1808년 겨울에 초안을 잡은 것을 둘째 아들 학포(學圃, 1786~1855)가 받은 것이고, 재고(再稿)는 1812년 겨울에 제자 이강회(李綱繪, 1789~?, 호:擊磬子)의 도움을 받아 10권으로 편정(編正)한 것이다. ≪춘추고징≫ 본문의 기록에 의하면, 이후 네 차례의 증보(增補)를 거쳐 총12권으로 완성되었다.
먼저 정약용은 ≪춘추≫ 삼전(三傳)을 읽다가 오례 관련 기사 중 의심스런 부분을 기록하여 ≪노례고(魯禮考)≫ 몇 권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1821년 봄에 상자에서 꺼내어 <잡례(雜禮)>로 개명하여 ≪춘추고징≫ 말미에 덧붙였다. <잡례>의 부록인 ‘좌전소잠(左傳小箴)’은 본래 1808년 겨울 정약용이 다산(茶山)에서 ‘환공(桓公, 재위 기원전 685 ~ 기원전 643) 6년조’까지 강학(講學)할 때 학포(學圃)가 기록했던 것을 1821년 증보 과정에서 부록으로 포함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10권의 ≪춘추고징≫을 완성한 뒤 ≪독례통고(讀禮通考)≫를 입수하고 그 책의 오류를 발견한 정약용은 1826년 늦겨울에 그 본문과 그에 대한 자신의 비평을 원편(原篇)에 덧붙이면서 ‘정씨육천지변(鄭氏六天之辨)', ‘선유논변지이(先儒論辨之異)', ‘정씨체제지변(鄭氏禘祭之辨)' 등을 덧붙였다. 1830년 봄과 1833년 한가을에 추가한 ‘체지설(禘之說)’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증보 내용을 보여준다.
≪춘추고징≫은 현재 3종의 이본이 전한다. 활자본으로는 1936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것이 있고, 필사본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이하 ‘규장각 소장본’)과 미국 버클리대(Berkely大) 도서관 아사미문고 소장본(이하 ‘버클리대 소장본’)이 있다. 필사본은 모두 ≪사암경집(俟菴經集)≫에 속한다. 이 3종의 이본은 현재 다산학술문화재단의 교감 작업을 거쳐 ≪정본(定本) 여유당전서≫ 제14책으로 간행되었다. 활자본은 모두 4권(≪여유당전서≫ 제2집, 경집 제33권~제36권)이며, 2종의 필사본은 모두 12권(≪여유당집(與猶堂集)≫, 제145권~제156권) 4책이다.
버클리대 소장본에서 두주(頭註)로 보충을 지시한 사항이 규장각 소장본에 반영된 것으로 볼 때, ≪사암경집≫ 수록본 중에서는 버클리대 소장본이 규장각 소장본보다 선행본이다. ≪여유당전서≫ 수록본은 ≪사암경집≫ 수록본보다 두 부분을 더 보충했다. ≪여유당전서≫ 수록본의 ‘체지설(禘之說)' 중 1833년에 추가된 부분에는 “≪周禮≫不言禘 … 癸巳孟秋, 又書”의 95자가 보충되었으며, 사(社) 1조에서는 “≪國語≫云 … 非后土也”의 인용문 31자가 추가되었다. 이는 1830년까지 추가한 기록만 싣고 있는 ≪사암경집≫ 수록본이 1833년 추가 증보한 내용을 담고 있는 ≪여유당전서≫ 수록본의 저본보다 앞선 선행본임을 알려준다.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춘추고징≫의 저본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암경집≫에 속하지 않는
≪여유당집≫의 ≪춘추고징≫으로 추정된다.
≪춘추고징≫은 ≪춘추≫ 경문과 삼전(三傳)에서 길례와 흉례에 관한 기사를 뽑아 유별(類別)로 나누어 일일이 고증한 뒤 말미에 정약용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주례≫와 ≪춘추≫ 경문을 전례의 경전적 기준으로 삼았고, ≪예기≫와 삼전은 선왕(先王)의 전례와 진(秦)ㆍ한(漢)대의 잘못된 학설을 구분할 자료로 비판적으로 활용했으며, ≪통전(通典)≫과 ≪독례통고(讀禮通考)≫ 등은 역대 사전(祀典)의 실상을 검토하기 위한 자료로 참고했다.
≪춘추고징≫은 주로 교(郊)와 체(禘)의 본말을 검토한 <길례(吉禮)>와 단상(短喪: 날[日]을 달[月]로 바꾸어 27개월의 3년상을 27일만에 치르는 상례 방식)의 오류를 논의한 <흉례>를 중심으로 주례(周禮)의 대강을 제시하였고, 크게 논쟁거리가 없는 <빈례(賓禮)>, <군례(軍禮)>, <가례(嘉禮)> 등은 간략하게 사례를 검토하였다. 정약용은 진ㆍ한 대의 잘못된 예설을 집중적으로 비판하였는데, 그러한 비판은 정현(鄭玄, 127~200, 자:康成)이 주장한 ‘교(郊)ㆍ체(禘)설’ 과
두예(杜預, 223~284)가 견지한 ‘단상설(短喪說)’ 에 집중되었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에 의하면 ≪춘추고징≫은
① 교(郊)가 상제(上帝)에게 제사하는 것임을 밝히면서 한유(漢儒)의 오방상제설(五方上帝說)의 오류를 바로잡았고,
② 체(禘)가 인제(人帝)인 오제(五帝)에 대한 제사임을 구명했으며,
③ 동지(冬至)에 원구(圜丘)에서 제사하는 것이 교천(郊天)의 제사가 아니라 회례(禬禮: 푸닥거리)임을 고찰했고,
④ 두예의 단상설이 오류임을 논증하였다.
먼저 <길례>에서는 ≪주례≫, <대종백(大宗伯)>의 천신(天神), 지기(地祇), 인귀(人鬼) 관념에 따라, 상제에 대한 제사인 ‘교(郊)’ 9조, 지기에 대한 제사인 ‘사(社)’ 3조, 인귀에 대한
제사인 ‘체(禘)’ 12조, ‘시향(時享)’ 7조, ‘삭제(朔祭)’ 3조, ‘묘제(廟制)’ 3조 등을 다루었다.
‘교’조에서는 노(魯) 희공(僖公, 재위 기원전 659 ~ 기원전 627)으로부터 비롯된 교(郊)가 자월(子月: 음력 11월)의 동지(冬至: 양력 12월 22일 혹은 23일 경)가 아니라 건묘월(建卯月: 음력 2월)에 실행되었고, 오방상제(五方上帝)가 아니라 호천상제(昊天上帝)를 대상으로 했으며, 북교(北郊) 제지(祭地)와 명당(明堂) 배식(配食)과는 무관했다는 점을 밝히는 등 교의 역사적 기원, 제사시기, 제사장소, 제사방식, 제사대상 등에 대해서 고증했다.
‘사’조에서는 일반적으로 자연신으로 숭배되었던 사직(社稷)의 예(禮)가 이관(二官)으로 이신(二神)에 배향(配享)하는 제사임을 논하는 한편, 오사(五祀)가 호(戶), 조(竈), 문(門), 행(行), 중류(中霤)의 자연신이 아니라 오행(五行)의 신(神)임을 밝혔다.
<체지설>에서는 체(禘)가 인제(人帝)인 오제(五帝)를 배천(配天)하는 제사임을 설명했다. ‘체’ 조에서는 8체(八禘)설의 오류를 지적하고, 체곡(禘嚳)이 체제의 역사적 기원임을 밝혔다. 먼저 5년 1체의 오류를 논하면서 협제(祫祭)의 문제를 설명했고, 삼년상을 마치면 본래 체시소목(諦視昭穆)의 제사가 없고 소상(小祥)의 연제(練祭) 뒤에 시체(始禘)의 제사가 없음을 논했으며, 시향의 체를 특체(犆禘)와 협체(祫禘)로 구별하고 태묘(太廟)에서만 협체하고 군공(群公)의 묘에서는 협체하지 않음을 설명했다. 또한 원구(圜丘)와 방택(方澤)의 주악(奏樂)과 출왕(出王)의 체가 경전적 근거가 없음을 논하는 한편, 사헌관(肆獻祼)과 궤식(饋食) 및 추향(追享)과 조향(朝享)이 체협(禘祫)이 아님을 논했으며, ≪시서(詩序)≫의 체에 관한 설명이 모두 증거가 없음을 논했다.
‘시향’조에서는 4계절의 제사인 ‘시향’의 시기는 각 계절의 중월(仲月: 음력 2, 5, 8, 11월)임을 논증하고 시향의 종류를 설명하는 한편, 종묘(宗廟)의 납제(臘祭: 동지(冬至)로부터 세 번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에 백신(百神)에게 지내는 제사)와 더불어 삼천(三薦)과 사천(四薦)의 제사가 올바른 시향이 아님을 역설했다.
‘삭제’조에서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의 설명을 비판하고, 두예(杜預)의 주(注)에 의거하여 곡삭(告朔)의 제사가 조향(朝享)임을 논하고, 태묘(太廟)에서 소사(小事)를 행하는 조향(朝享), 대사(大事)를 행하는 조정(朝正) 등에 대해 검토했다.
‘묘제’조에서는 은(殷)나라의 형제상속이 소목(昭穆) 제도와 상치됨을 논하고 세실(世室)제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비판했으며, 환공(桓公)의 궁(宮)과 희공(僖公)의 궁에 대한 설명과 첩모별궁(妾母別宮)의 법(法)을 논했다.
<흉례>에서는 주로 두예의 단상설을 비판하면서, ≪춘추≫ 경문(經文)에 나타난 왕조의 상례 기록 중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을 위제(違制) 12조, 유의(謬義) 15조, 박의(駁義) 5조, 즉위(卽位) 12조, 서장(書葬) 4조, 장소군(葬小君) 13조, 장천왕(葬天王) 4조, 장제후(葬諸侯) 1조, 봉수(賵襚) 2조 등으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정약용은 ≪상례사전(喪禮四箋)≫을 주석하면서 ≪춘추≫에서 많은 의식과 제도를 취했는데, 예제에서 어긋난 흉례의 시행이 적지 않아서 그것을 사례별로 비평한 것이 바로 <흉례>편이다.
한편 <길례>를 보완하는 ‘정씨육천지변’, ‘선유논변지이’, ‘정씨체제지변’에서는 주로 정현의 설을 강하게 비판하고 왕숙(王肅, 195~256)에서 주희(朱憙, 1130~1200, 호:晦庵)에 이르는 학설을 높게 평가하였다. 한편 상제를 유일무이한 호천상제로 보고 오제를 오인제(五人帝)로 보는 독자적인 설을 개진하였다. 또한 ≪길례통고(吉禮通考)≫를 인용하여 정현 이후 역대 학자들의 논변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비평을 제시하였다.
부록 가운데 <잡례(雜禮)>는 본래 ≪춘추≫ 삼전(三傳)에서 오례에 관한 의의(疑義)를 기록한 ≪노례고(魯禮考)≫로서, 길례, 흉례, 빈례, 군례, 가례, 재이(災異) 등을 다룬 것이며, ‘좌전소잠(左傳小箴)’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강학한 내용을 부록으로 추가한 것이다. 양자는 모두 ≪춘추고징≫에 선행하는 작업으로서, 오례를 포괄하는 다산 예학의 규모를 부분적으로나마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다.
≪춘추고징≫은 자구마다 포폄(褒貶)의 뜻을 찾으면서 공자(孔子 = 丘, 기원전 551 ~ 기원전 479, 자:仲尼)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강조했던 전통적 ≪춘추≫해석방식을 거부하고, ≪춘추≫를 사실에 근거한 역사서술로 본 주희의 관점을 계승했다. 다만 ≪춘추≫를 통해 선왕(先王)의 이상적인 전례를 모색하려고 한 점에서 오례(五禮)에 대한 예학 저술로서 더 가치가 높다. 특히 ≪춘추≫를 통해 이상적 전례를 밝히는 ‘이경증경(以經證經)’의 방식은 경전해석학의 방법으로 주목할 만하다. 정약용은 서로 다른 경전적 전거들을 문맥상 모순 없이 일치시켜 해석함으로써 경전 상호간의 정합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경전 주석과 후대 학설들이 용어의 사용과 논리의 전개에서 드러내는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춘추고징≫의 항목 분류와 구성방식은 크게 두 가지 자료의 영향을 받았다. 정약용은 1796년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가 내린 어명에 따라 자신이 직접 교감에 참여했던 내각본(內閣本) ≪춘추좌씨전≫(1797 간행)의 <춘추유례(春秋類例)>의 성과를 활용하여 ≪춘추≫ 기사를 주제별로 분류했다. 또한 청(淸) 대 서건학(徐乾學, 1631~1694, 호:健菴)의 ≪독례통고≫의 영향을 수용해서 오례(五禮) 관련 항목들을 삼례(三禮)와 역대 예전(禮典) 및 각종 저술에서 주제별로 집성하고 체계적으로 분류한 뒤, 그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안설(案說)”로 덧붙이는 방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따라서 ≪춘추고징≫은 당시 최고 수준에 이른 조선의 춘추학과 청 대 예학의 장점을 종합적으로 활용한 저술로서 평가할 수 있다.
≪춘추고징≫의 예설은 대체로 정현을 비판하면서 왕숙에서 주희로 이어지는 유교 주류의 예학을 계승했다. 그러나 교(郊)에 대한 해석에서 한학(漢學)과 송학(宋學)이 공유하는 음양오행론적 천관을 비판하고 초월적인 상제관을 부각시켰다. 또한 체, 사직, 오사 등에 대해서도 전통적으로 일반화된 자연신적 관점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공덕이 높은 인간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의례로 재해석함으로써 길례를 ‘인간중심적 의례’로 재평가했다. 이러한 상제관과 의례관은 인간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을 지향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박종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