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보의 民堡議

정약용이 향촌 단위의 자치 방위 체제인 ‘민보(民堡)’에 관해 쓴 책.

민보란 요해지(要害地: 전쟁에서 자기편에는 꼭 필요하면서도 적에게는 해로운 지점)에 산성이나 소규모 성곽인 ‘보(堡)’를 설치하여 평상시에 미리 주민을 편성해 훈련시키다가 유사시에 훈련된 전 주민이 산성이나 보에 들어가 관군(官軍)의 도움 없이 농성을 펼치면서 외적을 방어하는 체제이다. 정약용은 양난 이후 평화가 장기간 지속되어 관군이 무력해진 상황에서 국내 변란이나 대외 적침으로부터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향촌과 가족을 지킬 수 있는 방안으로 민보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명(明)의 윤경(尹耕, 1513~?, 자:子莘)이 지은 ≪보약(堡約)≫ 12장을 참조하고, 임진왜란기 산성방어론을 주장한 류성룡(柳成龍, 1542~1607, 호:西厓)의 견해를 적극 채용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내용은 총설에 이어 민보의 설치장소, 방어시설, 부대편성, 식량 확보책, 적의 동향 파악 및 척후활동, 인근 민보 사이의 상호 지원, 상벌규정 등을 17개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정약용의 민보방위론은 19세기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비변책에 큰 영향을 끼쳐 신헌(申櫶, 1810~1884)의 ≪민보집설(民堡輯說)≫을 비롯해 ≪어초문답(漁樵問答)≫, ≪민보신편(民堡新編)≫, ≪민보신약(民堡新約)≫ 등으로 이어졌다.

정약용은 강진(康津) 유배기에 흐트러진 군정(軍政)으로 군비(軍備)가 실종된 상황을 목격하였다. 또한 홍경래의 난(1811년)에서 국내 반란조차 진압하지 못하는 관군의 무능을 절감하였다. 더구나 일본의 정세도 심상치 않아 막부 체제의 균열로 성장하기 시작한 사쓰마(薩摩) 번(藩) 등이 조선을 침략한다면 이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고 보았다. 따라서 정약용은 지배층의 무능으로 열악해진 국방 현실, 특히 지방 군사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국방력 재건을 위해 향병(鄕兵)을 이끌어 낸 명(明)나라의 경험에 주목했으며, 이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소화해 독창적인 방위체제로 제안하고자 하였다. 정약용 이전에도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선구적인 향촌자위체제를 주창했는데 유사시 조직된 주민들이 산성이나 보에 들어가 지연전을 전개하면서 관군의 지원을 기다린다는 견해이다. 이에 비해 정약용은 온전히 민에 의한 향촌자위체제를 설정하여 민에 대한 신뢰와 자발성을 바탕으로 한 비변책이라 할 수 있다.

≪민보의≫는 후대에 끼친 영향력이 큰 만큼 판본도 다양해 현재 국내외에 19종 정도의 필사본이 남아있다. 구성은 대체로 목차와 본문으로 구성되었는데 목차가 없는 판본도 있다. 본문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총 3권이라 했으나 현전하는 필사본들은 대부분 2권(상권 ㆍ하권)으로 구성되었다. 참고로 영인본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1960)와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1973)에 실린 ≪민보의≫도 판본이 서로 다른데 모두 2권으로 구성되었다. 이 밖에 권수가 아예 없는 필사본도 존재한다. 본문의 내용은 판본에 따라 순서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종합해보면 17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위의 두 영인본의 편차를 소개하면, <총의(總義)>, <민보택지지법(民堡擇地之法)>, <보원지제(堡垣之制)>, <민보수어지법(民堡守禦之法)>, <민보편오지법(民堡編伍之法)>, <민보지량지법(民堡支糧之法)>, <민보농작지법(民堡農作之法)>, <민보경야지법(民堡警夜之法)>, <민보상구지법(民堡相救之法)>, <해도설보지법(海島設堡之法)>, <산사설보지법(山寺設堡之法)>, <민보점구지법(民堡覘寇之法)>, <민보상벌지법(民堡賞罰之法)>, <답객난(오칙)(答客難五則)>, <천파도설(天耙圖說)>, <호창거설(虎倀車說)>, <대둔산축성의(大芚山築城議)>이다.

<총의>는 머리말 또는 총설로서 일본에 대한 경계와 민보 설치의 필요성을 밝혔다.
<민보택지지법>에서는 민보를 설치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 네 가지와 부적당한 지형 일곱 가지를 설명하였다.
<보원지제>에서는 민보의 축성법을 설명하고 성곽 방어시설로 치성(雉城: 포루(砲樓), 적루(敵樓), 적대(敵臺), 포루(鋪樓), 노대(弩臺) 등 돌출된 성곽), 옹성(甕城), 포옥(砲屋), 비예(睥睨: 활을 쏘기 위해 성벽에 설치한 구멍) 등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민보수어지법>에서는 공성무기(攻城武器)의 제작과 용도를 설명하였다. 뇌석(擂石)ㆍ약탕(藥湯)ㆍ취회(吹灰)ㆍ분포(糞砲: 분뇨로 만든 포탄)ㆍ관환(串鐶)ㆍ천파(天耙: 성벽에 붙어 기어오르는 적을 제거하는 장비)ㆍ지위(地蝟: 발의 부상을 유도하기 위해 땅에 심은 화살촉 등)ㆍ함마갱(陷馬坑: 위장한 구덩이로 안에 뾰족한 죽편 등을 설치하여 사람이나 말을 살상을 목적으로 한 함정의 일종)ㆍ벽력온(霹靂蘊) 등을 권장했으며, 화기는 마련하기 어려우므로 생략했다. 그러나 동ㆍ철 등의 구입을 통한 총기 제작을 언급하여 화기 소지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민보편오지법>에서는 주민을 조직하고 간부조직의 편성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예컨대, 정군은 5명=1오(伍), 2오=1대(隊), 3대=1기(旗)로 편성하고, 보장(堡長)ㆍ보총(堡總)ㆍ보사(堡史)ㆍ관고(管庫)ㆍ감작(監作)ㆍ장약(掌藥) 등의 간부를 두도록 하였다. <민보지량지법>에서는 식량과 소금ㆍ장(醬) 등의 조달 방식과 배급 규정을 제시하였다.
<민보농작지법>에서는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해 적이 퇴각하면 즉시 기회를 보아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민보경야지법>은 야간 경계법으로, 적침이 우려되는 길목에 보초를 세우고 등화관제(燈火管制)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민보상구지법>에서는 ‘우보(耦堡)’라 하여 민보 상호간의 지원과 협조망을 구축하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해도설보지법>에서는 연안 도서지역에 민보를 설치하고 개인 소유의 배를 군선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산사설보지법>에서는 일반 민보의 예에 따라 사찰에 민보를 설치하고 지휘부를 구성하는 방식을 설명하였다.
<민보점구지법>에서는 왜구의 각종 기만전술을 소개하고 복병이나 척후병을 활용해 적정을 파악하는 방법을 설명하였다.
<민보상벌지법>에서는 민보의 상벌 규정을 설명하였다.
<답객난(오칙)>은 민보 설치의 장점 다섯 가지를 문답 형식으로 정리하였다.
<천파도설>에서는 성벽에 붙어 기어오르는 적을 제거하는 장비인 ‘천파’의 제작법과 이용법을 설명하였다.
<호창거설>은 성문 앞에 설치된 함정인 함마갱에 떨어져도 빠져 나올 수 있는 군사용 수레인 ‘호창거(虎倀車)’를 제작하는 법을 설명하였다. <대둔산축성의>는 정약용이 전라도 병마절도사영의 취약한 방어력을 보완하기 위해 해남 대둔산에 산성을 쌓고 민보를 설치하자고 주장한 글로 강진병마우후(康津兵馬虞侯) 이중협(李重協, 1762~?, 자:聖華)을 위해 작성했다는 부제가 붙어있다.

(정해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