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방강역고 我邦疆域考

정약용이 1811년(순조 11)에 편찬하고 1823~1836년에 증보한 한국의 강역과 지리에 관한 역사지리서.

정약용이 한국의 과거 역사지리에 대한 문헌을 정리하고 그 내용에 대하여 고증을 한 책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부터 조선 팔도의 연혁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변천을 대상으로 하였다. 정약용은 이 책의 집필을 통해 옛 강역과 수도의 위치, 그리고 조선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정약용은 각종 역사 문헌을 종합하여 기자조선 이래 강역의 역사적 변천과 당시 조선 민족의 기원을 정리하였다. 정약용은 당시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문헌을 정밀하게 고증하지 않고 또한 강역을 근거 없이 확장시켜 이해하였던 것을 비판하고, 엄밀한 고증에 입각하여 역사지리 비정을 진행하였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 의하면 ≪아방강역고≫는 1811년(순조 11) 봄에 집필하여 초고본을 완성하였으며, 1822년 작성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따르면 10권으로 구성되었다. 현존하는 초고본 ≪아방강역고≫는 목차 상으로 전체 10권으로 되어 있으나 제7권(<여진고>, <거란고>, <몽고고>)은 빠진 채 총 9권이 남아 있다. 정약용이 이 책에 대한 구상을 이미 10여 년 전에 시작하였다고 밝히고 있어, ≪문헌비고≫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여 1800년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를 저술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지리 관련 문건을 검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818년 귀양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뒤 초고본을 바탕으로 1833년 <북로연혁속(北路沿革續)>‚ <서북로연혁속(西北路沿革續)>을 증보하였고‚ 또한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동사세가(東史世家)≫를 본 후 <발해속고(渤海續考)>를 증보하여 총 12권의 수정본을 만들었다. <발해속고>에는 홍석주의 ≪동사세가≫, <발해세가>를 일부 수정하여 첨부해 두었다. 서술은 상고시대의 주요 국가, 부족, 지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강(綱)’으로 내걸고 이에 대한 관련 자료는 ‘목(目)’으로 제시한 다음, 자신의 논평을 “용안(鏞案)”, “우안(又按)”, “안(案)”으로 수록하였다. 이때 “용안”과 “우안”은 초고본의 안설이며, “안”은 수정본의 안설이다. 그리고 일부 주장은 간주 형식으로 수록하였다.

초고본 ≪아방강역고≫는 결실된 제7권을 포함하여 모두 3책 10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연세대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텐리대(天理大) 도서관, 버클리대(Berkely大) 도서관 아사미문고 등에 소장되어 있다. 제7권 부분이 모두 빠진 것은 정약용이 완성하지 못하였거나 혹은 1833년 수정하면서 제7권의 내용을 속편에 나누어 편재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수정본 ≪아방강역고≫는 4책 12권으로 고려대 도서관, 텐리대(天理大)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특히 고려대 도서관소장본은 외손인 윤정기(尹廷琦, 1814~1879, 호:舫山)가 필사한 것으로 제7권의 목차를 남긴 채 제10권까지는 초고본을 필사한 후, 증보된 부분은 다시 제10권~제12권으로 편재하였다. 필사본 ≪아방강역고≫를 가지고 1903년 장지연(張志淵, 1864~1921, 호:韋庵)이 내용을 대폭 수정하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라는 이름으로 황성신문사에서 활자본 9권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1935~1939년 정인보(鄭寅普, 1893~1950, 호:爲堂)ㆍ안재홍(安在鴻, 1891~1965)이 교감하여 ≪여유당전서≫를 간행하면서 수정본 ≪아방강역고≫를 제6집, 지리집 제1권~제4권(제68책~제69책)에 수록하였는데, 수정본 필사본의 3권 1책을 1권으로 편집하여 12권을 4권으로 줄였다.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가 1970년 경인문화사에서 영인(전6책)되면서 ≪아방강역고≫는 제6책에 수록되었으며, 1985년 여강출판사에서 간행한 판본(전21책)에는 제19책에 수록되었다.

초고본 ≪아방강역고≫ 가운데 연세대 소장본은
제1권 <조선고(朝鮮考)>ㆍ<사군총고(四郡總考)>ㆍ<낙랑고(樂浪考)>ㆍ<현도고(玄菟考)>;
제2권 <임둔고(臨屯考)>ㆍ<진번고(眞番考)>ㆍ<낙랑별고(樂浪別考)>ㆍ<대방고(帶方考)>;
제3권 <삼한총고(三韓總考)>ㆍ<마한고(馬韓考)>ㆍ<진한고(辰韓考)>ㆍ<변진고(弁辰考)>;
제4권 <변진별고(弁辰別考)>ㆍ<옥저고(沃沮考)>;
제5권 <예맥고(薉貊考)>ㆍ<예맥별고(薉貊別考)>ㆍ<말갈고(靺鞨考)>;
제6권 <발해고(渤海考)>;
제7권 <여진고(女眞考)>ㆍ<거란고(契丹考)>ㆍ<몽고고(蒙古考)>;
제8권 <졸본고(卒本考)>ㆍ<국내고(國內考)>ㆍ<환도고(丸都考)>ㆍ<위례고(慰禮考)>;
제9권 <한성고(漢城考)>, <팔도연혁총서상(八道沿革總敍上)>;
제10권 <팔도연혁총서하(八道沿革總敍下)>ㆍ<패수변(浿水辨)>ㆍ<백산보(白山譜)>
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7권은 결실되어 있다.
수정본 ≪아방강역고≫ 가운데 하나인 고려대 소장본은 여기에 속집으로 제10권에 <발해속(渤海續)>이, 제11권에 <북로연혁속(北路沿革續)>이, 제12권에 <서북로연혁속(西北路沿革續)>과 <부 구련성고(附九連城考)>이 추가되어 있으며,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아방강역고≫도 이와 같은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록 내용은 한국의 고대 국가의 강역과 역사, 초기 수도의 위치, 지방 단위의 역사 등을 다루었다.
정약용은 당시 조선의 민족적 기원을 동이(東夷: 고조선인)에 두었으며, 한강 이북의 조선(朝鮮)과 한강 이남의 한(韓)의 이원적인 발전관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17~18세기 역사지리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이용하였던 ≪요사(遼史)≫ㆍ≪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등의 자료를 고증을 통해 비판하고 조선(기자조선) 이래 상고사의 중심 무대를 한반도로 끌어들였다. 정약용은 북방지역의 역사지리에 오류가 많다고 보았으므로 북방 여러 국가와 부족의 역사적 변천 뿐만 아니라 졸본, 국내, 환도, 위례, 패수, 백산 등의 지리고증에 힘을 기울였다. 남방지역의 역사지리로는 삼한을 평안도나 경기도 일원으로 끌어올린 연구를 비판하고 이를 한반도 남부에서의 역사 발전으로 본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의 주장을 지지하였으며,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전하는 '직산(稷山) 위례설’을 비판하고 위례성을 한강 이북에 비정하였다. 그리고 마한과 백제가 남방지역에서 신라에 비해 앞서갔던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널리 퍼졌던 고조선 혹은 한사군의 만주 존재설을 부정하고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시키려는 것을 비판하였다. 다만 이러한 정약용의 한반도 중심의 고대사 이해는 조선 전기 역사지리서들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인식했던 것과도 다른 것으로, 요동(遼東, liaodong)지역의 문화가 청에 의해 함몰되어 가는 상황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아방강역고≫는 한국의 고대사를 해명하기 위한 목적에서 저술되었다. 이 책은 한백겸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강계고(疆界考)≫등과 함께 조선 중ㆍ후기의 대표적 역사지리서이며, 18세기까지 조선에서 이루어진 역사지리 연구의 내용과 수준을 극복하면서 나타난 저술이다. 특히 정약용은 이전의 여러 연구 성과를 모두 수렴하면서 각종 사료를 수집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 19세기 역사지리 연구의 새 장을 열었다. 그의 연구는 19세기 후반 외손이었던 윤정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김택영(金澤榮, 1850~1927)과 장지연이 편찬에 참여한 ≪증보문헌비고≫의 역사지리 비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박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