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례사전 喪禮四箋
상례(喪禮)의 고례(古禮: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의 예) 원형을 탐색한 저서.
상례를 <상의광(喪儀匡: 상례의 의식을 바로잡음)>, <상구정(喪具訂: 상례의 기물을 바로 잡음)>, <상복상(喪服商: 상례의 복식을 상고함)>, <상기별(喪期別: 상례의 기간을 변별함)>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한 것으로 유배기인 1803년부터 1811년에 걸쳐 완성된 저술이다.
정약용은 유배 초기를 예송(禮訟)을 재검토하고 그 경학적 근거를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군주 복제에 관한 논점들과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여 유배 1년 뒤인 1801년 <기해방례변(己亥邦禮辨)>을 쓰고, 여기에 자료를 보충하고 논점을 재정리하여 1805년 <정체전중변(正體傳重辨)>(≪상례외편(喪禮外篇)≫ 제3권)을 완성하였다. 이와 함께 1803년 상의광을 시작으로, 1805년 상구정, 1809년 상복상, 1811년 상기별의 4편으로 구성된 ≪상례사전≫을 마무리하였다. 1818년에 완성된 <국조전례고(國朝典禮考)>(≪상례외편≫ 제4권)를 더하면 상례(喪禮)에 관해서는 사례(士禮)와 방국례(邦國禮)를 아우르는 완정한 체계를 이루게 되었다.
≪상례사전≫은 현재 3종의 이본이 전해진다. 필사본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사암경집(俟菴經集)≫ 에 포함된 ≪상례사전≫과 ≪여유당집(與猶堂集)≫에 수록된 것이 있고, 활자본으로는 1936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것이 있다. 필사본은 모두 50권 17책인데 ≪사암경집≫의 경우는 제 2책이 결본이다. 활자본은 16권 8책으로 되어 있다.
≪상례사전≫의 체제
≪상례사전≫의 체제는 <상의광>, <상구정>, <상복상>, <상기별>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편제(編制)는 청(淸) 대 경학자인 서건학(徐乾學, 1631~1694)의 ≪독례통고(讀禮通考)≫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독례통고≫는 역대의 상례를 고증한 책으로 상기(喪期: 상복을 입는 기간)ㆍ상복(喪服)ㆍ상의절(喪儀節)ㆍ장고(葬考)ㆍ상구(喪具)ㆍ변례(變禮)ㆍ상제(喪制)ㆍ묘제(廟制)로 되어 있고,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 제5책에 ≪독례통고≫에 대한 의문점과 자신의 입장을 ≪독례통고≫의 책머리에 기록한 ”예고서정(禮考書頂)”(현재 ≪여유당전서≫ 제3집, 예집 제19권에 수록)의 일부가 ‘독례통고전주(讀禮通考箋注)’(≪여유당전서보유≫ 제5책, 경학편)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는 것도 ≪독례통고≫가 ≪상례사전≫의 구상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상의광>은 ≪의례(儀禮)≫의 <사상례(士喪禮: 사(士) 계층의 상례 의식: 初終에서 대렴ㆍ성복까지의 절차)>ㆍ<기석례(旣夕禮: 대렴 이후 매장까지의 절차)>ㆍ<사우례(士虞禮: 매장 이후 우제를 포함한 喪祭의 절차)>에 기록된 상례의 의식(儀式)를 검토한 것으로 17권 6책이다.
여기에는 ‘시사(始死)’‚ ‘습함(襲含)’, ‘소렴(小斂)’‚ ‘대렴(大斂)’, ‘기빈(旣殯)’‚ ‘장(葬)’, ‘우제(虞祭)’, ‘졸곡(卒哭)’‚ ‘부제(祔祭)’‚ ‘기장(旣葬)’‚ ‘소상(小祥)’, ‘대상(大祥)’‚ ‘담제(禫祭)’‚ ‘분상(奔喪)’‚ ‘방상(方喪)’ 등의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상구정>은 상례의식에 필요한 수의(壽衣)ㆍ관(棺)ㆍ부장품 등의 제도를 다룬 것으로 6권 2책이다.
여기에서는 ‘명(銘)’‚ ‘단조(丹旐)’‚ ‘전(旜)’‚ ‘중(重)’‚ ‘명의상(明衣裳)’‚ ‘괄계(鬠笄)’‚ ‘엄(掩)’‚ ‘충(瑱)’‚ ‘명목(幎目)’‚ ‘악수(握手)’‚ ‘결(決)’‚ ‘모(冒)’‚ ‘대(帶)’‚ ‘겹(韐)’‚ ‘홀(笏)’‚ ‘구(屨)’‚ ‘심의(深衣)’‚ ‘리(纚)’‚ ‘이두(裏肚)’‚ ‘늑백(勒帛)’‚ ‘고(袴)’‚ ‘부인상복(婦人上服)’‚ ‘부인중복(婦人中服)’‚ ‘부인잡복(婦人雜服)’‚ ‘순과낭(鬊瓜囊)’‚ ‘반건(飯巾)’‚ ‘목욕건(沐浴巾)’‚ ‘미구(米具)’‚ ‘혼백(魂帛)’‚ ‘소렴교(小斂絞)’‚ ‘대렴교(大斂絞)’‚ ‘금(紟)’‚ ‘소렴금(小斂衾)’‚ ‘대렴금(大斂衾)’‚ ‘포오(袍襖)’‚ ‘소렴의(小斂衣)’, ‘대렴의(大斂衣)’. ‘이금(夷衾)’, ‘침(枕)’, ‘망건(網巾)’, ‘관(棺)’, ‘칠성판(七星板)’, ‘출회(秫灰)’, ‘공축(輁軸)’, ‘찬도(欑塗)’, ‘순(輴)’, ‘천(輤)’, ‘신거(蜃車)’, ‘구거(柩車)’, ‘대여(大轝)’, ‘관식(棺飾)’, ‘피(披)’, ‘인불(引紼)’, ‘탁(鐸)’, ‘공포(功布)’, ‘순비솔(輴碑繂)’, ‘명기(明器)’, ‘상복하장(上服下帳)’, ‘역(帟)’, ‘죽격(竹格)’, ‘유단(油單)’, ‘견거(遣車)’, ‘현훈(玄纁)’, ‘관(椁)’, ‘인(茵)’, ‘견(見)’, ‘절(折)’, ‘항석(抗席)’, ‘항목(抗木)’, ‘전곽(甎槨)’, ‘광제(壙制)’, ‘분봉(墳封)’, ‘사초(莎草)’ 등 상례에 필요한 기구(喪具)가 다루어지고 있다.
<상복상>은 상주들이 착용하는 최(衰: 喪服)ㆍ관(冠)ㆍ질(絰: 수질과 요질)ㆍ대(帶: 띠)의 제도를 논한 것으로 6권 2책이다.
‘명의(名義)’‚ ‘승수(升數)’‚ ‘총제(總制)’‚ ‘의(衣)’‚ ‘상(裳)’‚ ‘관(冠)’‚ ‘수질(首絰)’‚ ‘환질(環絰)’‚ ‘요질(腰絰)’‚ ‘교대(絞帶)’‚ ‘포대(布帶)’‚ ‘장(杖)’‚ ‘구(屨)’‚ ‘중의(中衣)’‚ ‘심의(深衣)’‚ ‘묵최(墨衰)’‚ ‘효건(孝巾)’‚ ‘포망건(布網巾)’‚ ‘방립(方笠)’‚ ‘양립(凉笠)’‚ ‘황립(黃笠)’‚ ‘백립(白笠)’, ‘괄발(括髮)’‚ ‘피발(被髮)’‚ ‘문(免)’‚ ‘발(髮)’‚ ‘계(笄)’‚ ‘총(總)’‚ ‘부인수질(婦人首絰)’‚ ‘부인요질(婦人腰絰)’‚ ‘부인교대(婦人絞帶)’‚ ‘부인복(婦人服)’‚ ‘수복(受服)’‚ ‘겸복(兼服)’ 등 상복(喪服)과 이에 부속된 복식(服飾)이 다루어지고 있다.
<상기별>은 오복(五服: 참최, 자최, 대공, 소공, 시마)의 기간과 그 복을 입는 대상(對象)을 논한 것으로 21권 7책이다.
여기에서는 ‘부자(父子)’‚ ‘모자(母子)’‚ ‘출모(出母)’, ‘승중(承重)’, ‘출후(出後)’‚ ‘출가(出嫁)’, ‘조손(祖孫)’‚ ‘제부(諸父)’‚ ‘곤제(昆弟)’‚ ‘구고(舅姑)’‚ ‘부처(夫妻)’‚ ‘수숙(嫂叔)’, ‘제사(娣姒)’, ‘적첩(嫡妾)’‚ ‘자모(慈母)’, ‘종자(宗子)’‚ ‘외친(外親)’‚ ‘잡서(雜敍)’‚ ‘사우(師友)’, ‘신복(臣僕)’‚ ‘겸친(兼親)’‚ ‘추복(追服)’‚ ‘개장(改葬)’‚ ‘변례(變禮)’‚ ‘서론(緖論)’ 등의 복제(服制)가 기술되어 있다.
≪상례사전≫의 내용적 특징
≪상례사전≫의 서술상 그리고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본문에는 ≪의례≫와 ≪예기≫ 등 삼례서(三禮書)의 해당 구절을 뽑아 기록한 뒤 출전을 밝혔다. 이는 ‘삼례서의 성립이 늦기는 했지만 한(漢) 대 유자(儒者)들의 손에 의해 창작된 위서(僞書)일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정약용의 독특한 입장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 점은 ≪의례≫의 경문(經文)과 기문(記文)을 동일한 위격(位格)으로 취급하여 상례의 의절을 구성하고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즉 정약용은 ≪주례(周禮)≫, ≪의례≫는 말할 것도 없고, 공자(孔子 = 丘, 기원전 551 ~ 기원전 479, 자:仲尼)의 70제자들이 경(經)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기록한 주기(註記)로 규정되어온 ≪의례≫의 기문과 ≪예기≫의 내용을 ‘공자 자신이 보충하는 의미에서 붙인 예문(禮文)’으로 본다는 것이다.
둘째, 본문에서 한 행을 내려 각종 주석들을 기록하였고, 마지막에 ‘용안(鏞案)’이라고 표시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인용된 주석 가운데는 정현(鄭玄, 127~200, 자:康成)의 주(注)와 공영달(孔穎達, 574~648)의 소(疏)가 중심이 되었는데 대부분이 비판적 검토의 대상으로 언급되었다. 이와 함께 각종 정사(正史)들의 ‘예지(禮志)’ 편과 국가 전례 규정인 국전(國典) 류, 그리고 ≪주자가례(朱子家禮)≫와 ≪서의(書儀)≫ 등 예학자의 저술들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조선조 유학자의 경우 김장생(金長生, 1548~1631, 호:沙溪)과 이황(李滉, 1501~1570, 호:退溪) 등의 예설이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정약용은 주(周) 대에 완벽하게 정비된 예제(禮制)가 춘추시대에 이르러 쇠퇴하자, 공자는 이것을 보존하고 전하기 위하여 ≪의례≫와 같은 경전을 손수 정리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진(秦)을 거치면서 전적(典籍)이 멸실되고 예도 폐하여졌으며, 한(漢)이 일어난 지 백 년 동안 그것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돌이키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다시 한의 동천(東遷) 이후 위서(緯書)가 출현하자 고례는 더 이상 회복될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상례사전≫의 서문에서 “드디어 사상례 3편(기석례와 사우례까지도 포함한다)과 상복 1편, 그리고 그 주석을 가지고 정밀히 연구하고 탐색하느라 잠자는 것과 밥 먹는 것을 잊었다”라고 술회하였다. 이는 ≪상례사전≫의 경학적 토대가 고례인 ≪의례≫의 ‘사상례 3편과 상복 1편’임을 밝힌 것이었을 뿐 아니라 ≪상례사전≫은 한유(漢儒)들과 그들을 계승한 송유(宋儒)들에 의해 왜곡된 고례를 회복하고자 기획되었음을 천명한 것이었다. 정약용이 한 대 예학과 송(宋) 대 예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한 대 이래의 참위설과 송학에 의해 겹겹이 가려지고 왜곡된 선진 고경(古經)의 원래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이었고, 둘째는 한 대 예학의 장점인 ‘고고(考古)’와 송 대 예학의 장점인 ‘궁리(窮理)’를 결합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통하여 고례를 완벽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상례사전≫은 바로 이러한 정약용의 문제의식을 구현한 대표적 저술이다.
17세기 이후 조선 학계의 예론은 기본적으로 ‘≪주자가례≫를 고례의 정신에 따라 보완하는 길을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있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신분의 차이에 대한 반영 정도나 시속과 고례의 조화에 대해서는 상이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 점에서 보면 정약용의 ≪상례사전≫은 표면적으로는 ‘시속과 고례의 조화’라는 문제 의식을 벗어나 ‘고례의 원의(原義) 탐구’에 한층 더 집중한 저술로 보인다. 그러나 ≪상례사전≫은 단순히 고례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성경(聖經)의 원의 탐구’를 목표로 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을 ‘당대(當代)의 현실에 맞게 변용하여 적용’하려는 중층적 의도에서 기획된 저술이다. 당대의 현실에 적용하고자 하는 목표는 ≪상례사전≫의 요약본인 ≪상의절요(喪儀節要)≫를 통해서 실현된다.
(장동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