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강의 詩經講義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가 ≪시경(詩經)≫의 여러 내용에 대하여 질문한 것에 대하여 정약용이 답변한 저서.

1791년에 정조가 ≪시경≫의 내용에 대하여 질의한 800여 조목에 대하여 정약용이 강의 형식으로 답변한 저술이다.

≪시경강의≫의 저술 경위는 <시경강의서(詩經講義序)>에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정약용이 30세 되던 정조 15년(1791)에 정조로부터 ≪시경≫에 관한 800여 조목의 질문을 받아 40일 안에 답변을 완성하여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약용은 이에 20여 일을 더 연장해 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는 문헌을 널리 참고하여 ≪시경≫을 인용한 곳이나 논한 곳이 있으면 모두 순서대로 초록해 놓았다가 필요한 곳에 이를 수시로 인용하여 답변을 작성했는데, 자구의 훈고(訓詁) 문제를 해결하니 시가 담고 있는 의미가 저절로 밝혀졌다고 했다. 정조는 백가를 널리 인용하여 출처가 무궁하다고 하며 정약용의 해박한 지식을 극찬하였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자신의 저술을 나열하면서 이 책을 가장 먼저 제시하여 자기를 알아준 임금에 대한 뜨거운 충정과 함께 내용에 대한 자부심도 아울러 표시하였다.
현전하는 ≪시경강의≫는 초고본이 완성된 후 20년쯤 지난 1809년 가을에 유배지 강진(康津)에서 새로 정리하여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시경강의≫는 정조의 물음에 대한 답변일 뿐이어서 자신의 견해를 다 밝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정약용은 중풍이 들어 심신이 매우 불편하였기 때문에 제자 이청(李𤲟 = 李鶴來, 1792~1861, 호:靑田)에게 받아쓰도록 하여 완성하였다.

≪시경강의≫는 현재 3종의 이본이 전해진다. 활자본으로는 1936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간행한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것이 있고, 필사본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여유당집≫에 수록된 것과, 미국버클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된 것이 있다. 활자본은 전3권(≪여유당전서≫ 제2집, 경집 제17권~제19권)이며, 2종의 필사본은 모두 12권이다. 이 3종의 이본에 대한 교감 정본작업이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 진행되어 2012년 총1권(≪시경강의보유≫ 포함)으로 간행되었다.

≪시경강의≫의 체제는 <자서(自序)>, <총론(總論)>, <국풍(國風)>, <소아(小雅)>, <대아(大雅)>, <송(頌)>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론에서는 <소서(小序)>, <육의(六義)>, <정변(正變)>, <미자(美刺)> 등 ≪시경≫의 기본적 쟁점을 문답한 내용을 수록하였으며, 그 다음부터는 ≪시경≫의 체제에 따라 각 편의 시들을 거론하였다. ≪시경강의≫의 내용상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의(字義)의 명확한 파악에 바탕을 둔 훈고학(訓詁學)의 방법을 중시하였다. 정약용은 훈고가 분명해지면 의리(義理)가 저절로 드러난다고 여겼다.
둘째, 훈고의 자료로 선진(先秦)ㆍ양한(兩漢)의 시설(詩說)을 신뢰하였다. 이는 공자(孔子 = 丘, 기원전 551 ~ 기원전 479, 자:仲尼)의 시대에 가까울수록 경의 뜻이 변질되지 않아 순수하다고 보는 청(淸) 대 고증학자들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셋째, 송(宋) 대 주자학(朱子學)의 시경학과 청 대 고증학의 시경학을 비교검토하고 취사(取捨)하는 성격이 강했다. 정조는 주자학 시경설의 모순을 지적하고 모기령(毛奇齡, 1623~1716, 호:西河)을 비롯한 청 대 고증학의 시경설이 그 대안과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를 정약용에게 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정약용은 시경의 노래가 민간에서 전해지던 음시(淫詩)가 아니라 심성이 순정한 성현들이 시대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지은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정약용은 ≪시경≫의 시들이 ‘풍간(諷諫)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약용의 학설은 주희(朱熹, 1130~1200, 호:晦庵)가 <국풍> 등을 해석하며 수용했던 민간가요설(民間歌謠說)과 대비된다. 정약용은 모기령의 학설을 대부분 반박하였으나 그가 ≪시경≫의 시는 모두 성현(聖賢)이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 성현제작설(聖賢製作說 = 聖賢作詩說))에는 동조하였다. 그러나 성현제작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이론적 결함이 있는 학설이었다.
넷째, ≪시경강의≫는 조선의 시경학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특히 김창흡(金昌翕, 1653~1722, 호:三淵)과 이익(李翼, 1681~1763, 호:星湖)의 시경학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다섯째, 정약용은 시를 해설하면서 교훈적 의리를 밝히려는 뚜렷한 의도를 보여주었다. 그가 시경 전체를 간서(諫書)로 보고 음시의 존재를 부정한 것도 이러한 시 의식에 바탕을 두었다.

정약용 시경론의 핵심은 시 삼백여 편 가운데 <송(頌)>을 제외한 모두가 풍간(諷諫)과 직간(直諫)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시경관을 이은 한 대 시경학의 통설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송 대에 이르러 주희는 이러한 통설과는 다른 시각에서 ≪시경≫의 시를 이해했다. 주희는 ≪시경≫, 특히 <국풍>의 시들은 민간의 백성들이 지은 민요이므로 남녀간의 애정을 다룬 음시(淫詩)가 다수 들어있다고 파악했다. 이러한 주희의 시경론은 명말청초에 이르러 여러 학자의 도전을 받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기령이었다. 모기령은 여러 저작을 통해 다각도로 주희의 시경론을 비판했다. 이러한 모기령의 견해는 이익, 정조, 정약용 등 조선의 학계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정약용은 주희의 민간가요설을 부정했다는 점에서 모기령과 같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청 대 고증학의 지나친 번쇄함과 현실도피적 경향은 배제하였다. 명물고증학(名物考證學)을 바탕으로 하되 이를 경세치용(經世致用)으로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정약용의 시경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오늘날의 시경 연구에서는 이러한 정약용의 학설과는 달리 주희의 민간가요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김언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