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정약용의 저술은 조선시대에 간행된 것은 ≪이담속찬(耳談續纂)≫ 뿐이었고, 유고(遺稿)들은 필사본의 형태로 전해졌다.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실용적인 저술은 지방관들이 필사하여 실무에 참고하였을 뿐이었으며 대부분의 저작들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마재의 고택에 보관되었다.
이후 1902년에 현채(玄采, 1886~1925)와 양재건(梁在謇)이 ≪목민심서≫를 간행하였고, 이후 ≪흠흠신서≫, ≪아언각비(雅言覺非)≫, ≪이담속찬≫, ≪경세유표(經世遺表)≫의 일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가 차례로 간행되었다.
1925년(乙丑) 대홍수로 여유당(與猶堂)이 떠내려가면서 저작들도 유실될 위기에 이르렀으나, 그의 후손 정규영(丁奎英, 1872~1927)의 필사적 노력으로 유고(遺稿)를 구해내었다. 이듬해 전서를 발간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결실을 매지 못하였으며, 이후 1930년대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의 흐름 속에서 1934년부터 신조선사(新朝鮮社)가 ≪여유당전서≫를 발간하였다.
정약용의 저술을 망라한 책이 간행된 것은 ≪여유당전서≫가 처음이었다. ≪여유당전서≫는 전체 분량이 76책이나 되어 이를 인쇄하는 데 많은 경비가 필요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윤치호(尹致昊, 1865~1945), 공성학(孔聖學, 1879~1957), 김사정(金思定, ?~?) 등의 헌금과 독자들의 구독 예약을 받아 400부의 한정판을 발간, 배본하였다. 1934년 10월 10일부터 1938년 10월 25일까지 총76회에 걸쳐 발간, 배본하였다.
1960년에 문헌편찬위원회에서 ≪여유당전서≫에 ≪민보의(民堡議)≫와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를 더하여 4책의 영인본으로 간행했고, 1970년에 경인문화사에서 ≪여유당전서≫를 6책으로 축소하고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와 <부록(附錄)> 1책을 보태어 영인본으로 간행했다. 다수의 연구자들이 ≪여유당전서≫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책의 형태는 선장본(線裝本: 전통적인 제본 방식의 책으로 한 장의 인쇄면의 중앙을 접어 앞 뒤 면으로 만들고 책등 쪽에서 실로 꿰어 묶어 만든 책)이며, 사주쌍변(四周雙邊: 내지의 둘레에 쳐진 두 개의 검은 선)에 계선(界線: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구분하기 위해 그은 선)이 있다. 판심(板心: 인쇄한 종이를 반으로 접어 앞 뒤 면을 만들때 그 접힌 부분이 목판의 중앙인 판심에 해당) 상단에 “與猶堂全書”라 인쇄했고, 상단에 흑어미(黑魚尾: 인쇄한 종이를 접어 앞 뒤 면을 만들 때 그 중앙을 기준으로 양쪽에 물고기의 꼬리 문양이 대칭되게 인쇄한 것을 어미라고 하며, 검은 어미를 지칭)가 있으며, 반곽(半郭: 인쇄한 종이를 반으로 접었을 때 테두리의 안쪽면에 해당)의 크기는 20.2×12.8cm, 각 면에는 13행 28자가 기록되어 있다. ≪여유당전서≫ 154권 76책은 모두 7개 집(集)으로 구분되며, 시문집(詩文集) 25권 12책, 경집(經集) 48권 24책, 예집(禮集) 24권 12책, 악집(樂集) 4권 2책, 정법집(政法集) 39권 19책, 지리집(地理集) 8권 4책, 의학집(醫學集) 6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조선사(新朝鮮社)는 처음 총 8집의 기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제8집으로 안배하였던 잡찬집(雜纂集)을 제1집 시문집의 부록으로 편입하면서 총 7집으로 구성하였다.
시문집은 시(詩) 7권 3책, 문(文) 15권 8책, 잡찬(雜簒) 3권 1책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시에는 ‘부(賦)’, ‘시(詩)’, ‘송파수작(松坡酬酢)’,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 ‘우세화시집(又細和詩集)’, ‘귀전시초(歸田詩草)’, ‘천우기행(穿牛紀行)’, ‘자의시(字義詩)’, ‘경의시(經義詩)’, ‘용문산(龍門山)’이 있다. 문에는 ‘대책(對策)’, ‘책문(策問)’, ‘의(議)’, ‘소(疏)’, ‘원(原)’, ‘설(說)’, ‘계(啓)’, ‘장(狀)’, ‘논(論)’, ‘변(辨)’, ‘잠(箴)’, ‘명(銘)’, ‘송(頌)’, ‘찬(贊)’, ‘서(序)’, ‘기(記)’, ‘발(跋)’, ‘제(題)’, ‘서(敍)’, ‘묘지명(墓誌銘)’, ‘묘표(墓表)’, ‘비명(碑銘)’, ‘제문(祭文)’, ‘뢰(誄)’, ‘유사(遺事)’, ‘행장(行狀)’, ‘전(傳)’, ‘기사(紀事)’, ‘증언(贈言)’, ‘가계(家誡)’, ‘서(書)’,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 ‘잡문(雜文)’, ‘여문(儷文)’, ‘잡평(雜評)’이 있고, 잡찬에는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 ≪아언각비≫, ≪이담속찬≫, ≪소학주관(小學珠串)≫이 있다.
경집에는 ≪대학공의(大學公義)≫ 1권, ≪대학강의(大學講義)≫ ≪소학지언(小學枝言)≫ ≪심경밀험(心經密驗)≫ 1권, ≪중용자잠(中庸自箴)≫ 1권,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1권, ≪맹자요의(孟子要義)≫ 2권,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10권, ≪시경강의(詩經講義)≫ 3권,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 1권, ≪상서고훈(尙書古訓)≫ 8권, ≪매씨서평(梅氏書平)≫ 4권(閻氏古文疏證鈔 포함), ≪춘추고징(春秋考徵)≫ 4권, ≪주역사전(周易四箋)≫ 8권, ≪역학서언(易學緖言)≫ 4권이 있다. 예집에는 ≪상례사전(喪禮四箋)≫ 16권, ≪상례외편(喪禮外編)≫ 4권,≪상의절요(喪儀節要)≫ 2권(嘉禮之式 포함), ≪가례작의(嘉禮酌儀)≫ ≪예의문답(禮疑問答)≫ 1권, ≪풍수집의(風水集議)≫ 1권이 있고, 악집에는 ≪악서고존(樂書孤存)≫ 4권이 있다. 정법집에는 ≪경세유표≫ 15권, ≪목민심서≫ 14권, ≪흠흠신서≫ 10권이 있고, 지리집에는 ≪(아방)강역고(疆域考)≫ 4권, ≪대동수경(大東水經)≫ 4권이 있으며, 의학집에는 ≪마과회통(麻科會通)(부(附) ≪의령(醫零)≫ 6권이 있다.

활자본 ≪여유당전서≫가 보급되면서 정약용에 관한 연구도 크게 늘어났다. 1935년 6월에 간행된 ≪신조선(新朝鮮)≫에서는 다산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특집호를 마련했는데, 이건방(李建芳, 1861~1939, 호:蘭谷), 백남운(白南雲, 1895~1979), 정인보, 안재홍, 백낙준(白樂濬, 1895~1985), 박종화(朴鍾和, 1901~1981) 등이 정약용과 관련된 글을 발표하였다.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는 안재홍, 현상윤(玄相允, 1893~?), 박종화, 최익한(崔益翰, 1897~?) 등이 ≪여유당전서≫를 활용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정약용의 저술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연구를 남긴 홍이섭(洪以燮, 1914~1974)은 1954년에 ≪여유당전서≫의 완질을 구하여 연구를 할 수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1962년에는 북한 과학원 철학연구소에서 ≪다산정약용 탄생 200주년 기념 론문집≫을 간행했는데, 이때에도 ≪여유당전서≫가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또한 해방 이후 한국에서 이루어진 정약용 연구나 번역 사업은 ≪여유당전서≫나 그 영인본을 자료로 활용하였으므로, 이 책은 정약용 연구의 활성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여유당전서≫는 매우 유용한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정인보는 ≪여유당전서≫가 간행된 이후 새로운 자료가 계속 나타나자,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이전부터 ≪여유당전서≫의 보유편(補遺編)을 편찬할 것을 구상했다고 한다. 또한 홍이섭은 1965년에 작성한 글에서 ‘≪여유당전서≫가 정약용의 학적 체계를 살필 수 있는 유일한 정본(正本)이지만, 이를 이용하려면 상세한 색인이 필요하고, 연보(年譜)와 총목(總目)의 첨가가 긴요하며, ≪민보의≫가 누락된 것이 불만이라’고 했다. 이는 ≪여유당전서≫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여유당전서≫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정약용이 작성한 저술의 권수(卷數)를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약용이 1822년에 작성한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의하면 그의 저술은 경집 232권, 문집(文集) 267권을 합하여 총 499권에 이르렀다. 또한 정약용이 말년에 정리한 가장본(家藏本) ≪열수전서(冽水全書)≫의 총목록에 의하면, 그의 저술은 경집 250권 88책, 문집 87권 30책, 잡찬(雜簒) 166권 64책을 합하여 총 503권 182책에 이르렀다. 활자본 ≪여유당전서≫의 ‘154권’과 필사본 ≪열수전서≫의 ‘503권’을 비교하면 권수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통상 3권 1책으로 묶여진 필사본 1책을 ≪여유당전서≫에서는 1권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유당전서≫에는 정약용의 중요한 저술인 ≪민보의≫가 빠졌고, 독립 저술인 ≪염씨고문소증초(閻氏古文疏證鈔)≫ 4권이 ≪매씨서평≫에 포함되어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다음으로 ≪여유당전서≫의 편차(編次)는 <자찬묘지명>에서 정약용이 언급한 자신의 저술 분류에 관한 언급이나 ≪열수전서≫에서 보이는 편차와는 큰 차이가 있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술을 경집, 시문집, 잡찬으로 구분하였고 ≪열수전서≫는 이 순서대로 저술을 편집했지만, ≪여유당전서≫에서는 이를 7종의 집(集)으로 나누고 시문집, 경집, 예집, 악집, 정법집, 지리집, 의학집의 순으로 편집했다. 이는 경학 연구를 시문보다 중시하였던 정약용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는 편집 방식이었다.

또한 ≪여유당전서≫의 시집에는 정약용이 강진(康津)에 유배 중이던 1811년부터 1818년까지 작성한 시가 수록되지 않았고, 1819년 이후에 지은 시는 그 연대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순서가 뒤섞여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다음으로 필사본에서는 저술의 성격을 저(著), 설(說), 찬(撰), 찬(纂), 집(輯), 술(述), 편차(編次), 편(編), 초(抄) 등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여유당전서≫에서는 이러한 구분을 하지 않고 모든 저술을 ‘저(著)’로 통일하였다. 또한 필사본에서는 정약용이 저술의 편찬에 참여한 제자들의 이름과 역할을 일일이 기록해 두었는데, ≪여유당전서≫에서는 이를 삭제했다.

≪여유당전서≫가 가진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산학술문화재단에서는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정약용 저술의 다양한 판본과 저작을 수집ㆍ교감하고 현대적인 표점을 부가하여 ≪정본(定本) 여유당전서≫를 편찬, 간행하였다.

(김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