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전서 冽水全書
‘열수(洌水)’는 정약용의 집 앞을 흐르는 ‘한강(漢江)’을 가리킨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술에 반드시 “열수(洌水) 정용(丁鏞)”이라고 표기하였다. 이 때문에 ‘열수’를 정약용의 별호(別號)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약용이 자신의 이름 앞에 ‘열수’라는 글자를 쓴 데에는 이유가 있다. 전통적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은 자신 저술에 본관(本貫)과 함께 이름을 표기했다. 예를 들어, ‘경주(慶州) 김(金)◌◌’ 형식으로 표기했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에는 본관이 아닌 자신의 사는 곳을 이름 앞에 썼다. 예를 들어, 주이존(朱彝尊, 1629~1709)의 경우 ‘수수(秀水) 주이존’으로 표기했다. 여기서 ‘수수’는 본관이 아니라 주이준이 사는 곳이다. 정약용은 한국의 문인들의 표기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자신의 이름 앞에 본관이 아닌 거주지를 표기했다. 아울러 자손들에게도 반드시 ‘열수 정◌◌’로 표기하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열수’가 정약용의 호가 아님은 명백하다. 다만, ‘열수’라는 글자를 넣어 ‘열상노인(洌上老人)’, ‘열초(洌樵)’ 등으로 자신을 표기했을 뿐이다. 그런데 정약용 사후 그의 현손인 정규영은 정약용의 저술을 ‘열수전서’라는 이름으로 재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그 총목록이 전하고 있는데, 정약용이 직접 정리한 ≪여유당집≫과 대부분 일치하지만 만년에 수정한 부분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열수전서는 정규영이 기록한 총목록과 함께 일부 저술에 ‘열수전서’의 표기가 남아 있다. 먼저 미국 버클리대 아사미문고 소장본 ≪매씨서평(梅氏書平)≫(전9권) 1~4권과 그것을 전사(傳寫)한 규장각(奎章閣) 소장본의 권수제(卷首題)가 ‘열수전서’이며, 표제는 ‘사암경집(俟菴經集)’이다. 또 안춘근이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증한 필사본 중 문집 10책에 ‘열수전서 속집(續集)’이라는 표제가 있는데, 이들의 권수제는 ‘여유당문집(與猶堂文集)’이다. 책의 형태는 ≪여유당집≫과 다르지 않다.
≪열수전서≫의 존재가 처음 소개된 것은 최익한(崔益翰, 1897~?)의 글을 통해서다. 신조선사(新朝鮮社)가 ≪여유당전서≫를 간행하자 최익한은 그 책을 읽고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이라는 글을 ≪동아일보(東亞日報)≫에 1938년부터 1939년 사이 65회에 걸쳐 연재했는데, 그 14번째 연재에서 정약용의 현손 정규영의 필체로 된 <열수전서 총목록>을 옮겨 실었다. 그 뒤 ≪실학파와 정다산≫에서도 오기(誤記)를 일부 수정하여 그 목록을 수록하였다. <열수전서 총목록>에 따르면 ≪열수전서≫의 규모는 총 182책 503권이며, 경집(經集) 88책 250권, 문집(文集) 30책 87권, 잡찬(雜簒) 64책 16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목록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集中本, 1822)에 수록된 저술 목록과 전반적으로 일치하나, ≪상서(尙書)≫ 연구서의 개정, ≪풍수집의(風水集議)≫의 집필 등 회갑 이후 정약용의 저술 활동이 반영되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열수전서≫는 총목록이 남아 있고, 일부 저술에만 ‘열수전서’라는 표기가 남아 있는 실정이므로 ≪열수전서≫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는 ≪여유당집≫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언급되고 있다. ≪열수전서≫는 정약용 사후 후손들이 그의 저술을 간행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정리한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열수는 정약용의 호가 아니라 그가 살던 곳의 지명이므로 정약용의 저술을 망라한 서명으로는 부적절한 측면도 있다.
(박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