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집
조선시대 문집은 자신이 직접 정리한 경우도 있고, 사후에 자손이나 제자들이 정리하는 경우도 있다. 정약용의 경우에는 철저히 자신이 직접 정리하였다. 그것은 죄인 신분인 정약용의 입장에서는 후대에 자신에 대한 평가가 저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유배지인 강진에서 이루어졌는데,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온 뒤로 죽기 전까지 계속 수정 및 보완하였다.
그는 회갑을 맞은 1822년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저술들을 일정한 체계로 정리하였다. 정약용은 자신의 저술을 크게 ➊ 경집(經集), ➋ 문집(文集), ➌ 잡찬(雜簒)으로 분류하였다. 그중 경집은 특별히 ‘사암경집(俟菴經集)’이라 불렀다. 정약용은 이런 자신의 저술을 일정한 체계하에 정리하고 ≪여유당집≫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배지에서 저술할 당시에는 제자들이 저술을 도와주었지만, 고향에 돌아온 뒤로는 자신의 일을 도와줄 제자가 없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각 책마다 ‘여유당집’의 표기 위치에서 차이가 난다. 즉, 일부의 저술은 표제에 ‘여유당집’이라 하였고, 일부는 권수에 ‘여유당집’이라 하였으며, 또 일부의 경우에는 권수제 아래쪽에 ‘여유당집’이라 표기하였다. 이는 정약용이 자신의 저술을 일정한 체계하에 다시 필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저술을 그대로 가져다 ≪여유당집≫의 체계하에 ‘여유당집’이란 글자만 써넣어 재편집했던 것이다. 그러나 잡찬의 경우 대부분 ‘여유당집’의 표기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완전히 마무리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 저작의 필사본 중에서 ‘여유당집’이라는 표기가 있는 것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버클리대 아사미문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개인소장 등 여러 곳에 소장되어 있다. 대체로 24×15㎝ 내외의 작은 크기이고, 무늬 없는 짙은 갈색 표지에 4침 선장(線裝)한 형식은 중국 책과 유사하다. 검은색 줄을 친 원고지에 10행 22자로 필사하였다. 이는 정약용 저술에 공통된 원고지와 같은 것이다.

‘여유당집’이라는 표기는 ≪시경강의(詩經講義)≫,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 ≪매씨서평(梅氏書平)≫,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상례사전(喪禮四箋)≫, ≪상례외편(喪禮外篇)≫, ≪이례초(二禮抄)≫, ≪사례가식(四禮家式)≫, ≪상의절요(喪儀節要)≫, ≪악서고존(樂書孤存)≫, ≪주역사전(周易四箋)≫, ≪춘추고징(春秋考徵)≫, ≪여유당집잡문(與猶堂集雜文)≫, ≪문헌비고간오(文獻備考刊誤)≫, ≪풍수집의(風水集議)≫, ≪여유당시집(與猶堂詩集)≫, ≪여유당문집(與猶堂文集)≫, ≪경세유표(經世遺表)≫,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민보의(民堡議)≫ 등의 필사본에서 보인다.

정약용 저작 필사본의 전승 과정에 대한 개별적 연구가 축적되었다. ≪여유당집≫에 본격적으로 주목한 연구는 조성을(2004)에 의해 수행되었다. 조성을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수록된 목록을 ≪여유당집≫을 위한 구상이었다고 파악하고, ‘자찬묘지명 체제’의 복원을 시도하였다. 김문식은 ‘자찬묘지명 체제’에 따라 ≪여유당전서≫ 경집을 재구성할 수 있음을 보였다.

정약용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저술을 남겼다. 따라서 그의 문집 형식 또한 일반적인 학자들의 문집과는 전혀 다르다. 조선시대 학자들의 문집이 시문과 서간, 그리고 관직 생활 중의 상소문이 중심인데 반해, 정약용의 문집은 경학 연구물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고, 시문은 물론이고 별도의 저작도 상당수에 이른다. 따라서 때문에 기존 문집 형식에는 맞지 않는다. 정약용은 이 때문에 ≪여유당집≫이라는 체계 속에 자신의 전체 저술을 망라하여 정리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집 체계는 중국에서는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지만 조선에서는 유일한 것이다.

(박철상ㆍ김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