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학 考證學
중국 명(明, 1368~1644) 대 말기에 시작하여 청(淸, 1644~1912) 대에 성행했던 경전 연구의 방법 또는 학풍.
‘고증(考證)’의 ‘고(考)’의 의미는 ‘밝히다’이며, ‘증(證)’의 의미는 ‘증거를 찾다’이다. 따라서 고(考)와 증(證)을 붙여 쓰면 ‘증거를 찾아 밝히다’의 의미가 된다. ‘고증’ 또는 ‘고거’는 현대어로 말한다면 ‘근거를 찾아 밝히는 증명작업(evidential research)’이라고 할 수 있다. 고증학은 ‘고거학(考據學)’ 또는 ‘박학(樸學)’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증’이라는 개념은 중국 남송(南宋) 대의 왕응린(王應麟, 1223~1296)이 처음 사용하였지만, 청 대 건륭(乾隆, 1736~1795)ㆍ가경(嘉慶, 1796~1820) 연간에 들어서 경전 해석 방법론으로 크게 성행하게 되었다. 정약용은 청 대의 고증학자들의 경학 연구 방법들을 선별적으로 원용하여 원시유학의 정신을 밝히려 하였다.
청 대 고증학의 흥기는 명(明)나라 말기에 흥성한 왕학(王學: 양명학) 좌파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명말의 왕학 좌파 사상가들은 경전이나 주석에 기대지 않고 개인의 주관적 이해에 근거하여 심성(心性)에 관한 고담(高談)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민족인 여진족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자 명말ㆍ청초의 학자들은 광선(狂禪)으로 흘러가던 당시의 공소한 학술 풍조를 비판하고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위한 실학(實學)으로 학문 노선을 전환하고자 하였다. 청 대 실학자들은 한편으로 유교 경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도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실학에 대한 경전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고증’을 방법론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명말청초의 대표적 사상가인 고염무(顧炎武, 1613~1682)와 황종희(黃宗羲, 1610~1695)는 이지(李贄, 1527~1602)로 대변되는 명말 왕학의 퇴폐한 학술 풍조가 명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고 보았고, 안원(顔元, 1635~1704)은 이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송(宋) 대의 정주(程朱) 성리학자들에게 시대적 혼란의 궁극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정주 성리학은 선불교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내면의 수양(修養)만을 중시하여 관념적 지식인을 양산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식인들은 나라가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단호한 판단력과 결단력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증학의 흥성의 배경에는 강희(康熙, 1662~1722) 연간부터 건륭(乾隆, 1736~1795) 연간까지 지속된 “문자옥(文字獄: 정부의 지식인 탄압)”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청초의 문자옥은 청조(淸朝)에 반대하는 언론을 탄압하고 사상통제를 강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청조는 특히 비판적 지식인들의 진취적 연구 활동을 금함으로써 ‘반청복명(反淸復明)’ 움직임을 차단하고 문화 전제주의를 강화해나갔다. 이러한 사상 탄압의 분위기 속에서 창의적인 학문의 기상은 억눌리고, 대신 현실과 담을 쌓은 채 고증학적 경전 해석에만 몰두하는 기풍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근래에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한 연구에 의하면, 청 대 고증학의 흥기는 꼭 청조의 문화 전제주의 때문만이 아니라 고증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전문직업화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청 대에는 진사(進士) 급제자가 너무 많이 배출됨에 따라 관료의 길로 나아갈 수 없게 된 많은 학자들이 각계의 제도적ㆍ재정적 지원을 받아 고증학적 학술활동에 종사함으로써 고증학이 활성화되었다는 것이다.
관료층의 재정적 후원에 힘입어 유교 경전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던 고증의 기풍은 점차 전문화된 분과 영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증학은 단지 문자의 훈고(訓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대의 명물(名物), 상수(象數), 전장(典章), 제도(制度)까지 탐구하는 종합적 연구방법이 되었다. 따라서 고증학은 판본학, 문헌학, 목록학, 교감학, 문자학, 성운학, 훈고학, 박물학, 분류학, 문화사, 제도사 등의 다양한 전문 영역으로 심화되었고, 이런 분야에 대한 집약적 연구는 청 대 학술사의 찬란한 업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고증학의 학풍은 크게 절동(浙東) 학파와 절서(浙西) 학파로 나뉜다. 절동학파는 황종희, 만사동(萬斯同, 1638~1702), 전조망(全祖望, 1705~1755), 장학성(章學誠, 1738~1801), 요제항(姚際恒, 1647~1715), 최술(崔述, 1740~1816) 등으로 대표되며, 역사학을 축으로 삼아 역사고증과 고사(古史) 비판에 주력하였다. 절서학파는 혜동(惠棟, 1697~1758), 전대흔(錢大昕, 1728~1804), 대진(戴震, 1724~1777), 단옥재(段玉裁, 1735~1815), 왕념손(王念孫, 1744~1832), 왕인지(王引之, 1766~1834) 등으로 대표되며, 이들은 훈고학(訓詁學), 문자학(文字學), 성운학(聲韻學) 등의 지식을 활용하여 유교경전의 본래 의미를 밝히는 데 주력하였다.
정약용은 공허하게 리기론(理氣論)에 몰두하던 조선 후기의 학술계를 비판하고, 청 대에 성행하던 고증학의 방법을 원용하여 원시 유학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경전에 대한 주자학적 의리(義理) 해석이 자의적으로 흐를 수 있음을 경계하고, 한 대 훈고학과 청 대 고증학의 방법에 의거하여 고훈(詁訓)을 밝혀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경전해석의 전승에 의해 얻어진 전문(傳聞)과 스승의 경전해석을 존중하는 사승(師承)의 학문방법이 자의(字義)와 훈고(訓詁)를 밝히는 데 보다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정약용은 이러한 고증학적 방법론에 의거하여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ㆍ≪맹자요의(孟子要義)≫ㆍ≪상서고훈(尙書古訓)≫ 등의 주석서를 저술하였고, 그 밖에도 ≪시경≫과 ≪대학≫ 등의 유교 경전에 상세하고 치밀한 주를 달았다. 그러나 정약용이 고증학을 방법론을 택했다고 하여 청 대 고증학자들의 견해를 무조건 따랐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청 대 고증학자인 염약거(閻若璩, 1636~1704)의 학문적 성과를 적극 수용하기도 했지만, ≪매씨서평(梅氏書平)≫에서는 모기령(毛奇齡, 1623~1716, 호:西河)의 ≪상서≫ 해석에 예리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청 대 고증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엄격한 기준에 의거하여 선별적으로 수용하려던 주체적 사상가로서 정약용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승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