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 西學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학문ㆍ종교 혹은 그 수용 과정에서 드러난 제반 흐름을 지칭하는 용어.
서학이란 용어는 18세기 후반부터 기록에 나타났다. 그 이전에는 이를 ‘양학(洋學: 서양의 신학)’, ‘서사지학(西士之學)’, ‘서태지학(西泰之學)’, ‘천학(天學)’ 등으로 불렀으며, 이를 배척하는 입장에서는 ‘사학(邪學)’ 혹은 ‘요학(妖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정약용은 특히 천주교를 가리켜 서양 ‘사설(邪說)’ 혹은 ‘서교(西敎)’라 하였다. 서학은 크게 서구 문물과 천주교의 두 가지 요소로 구분되는데, 중국의 ‘청구문화(淸歐文化 : 청 사회에 수용된 서구 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북학론(北學論)’도 근본적으로는 서구 문물의 수용을 근간으로 하는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이었다. 서학이 전래ㆍ수용된 배경에는 새로 일어난 ‘실학(實學)’ 내지는 북학, 서양의 천문ㆍ역법에 대한 수용 의지, 탈주자학(脫朱子學)의 학풍 등이 있었다.
16세기부터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천주교를 전하면서 명말의 일부 사대부 사이에는 서학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사조가 청(淸) 대까지 이어지면서 중국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 결과 17세기 초부터는 연행사(燕行使)들을 통해 조선에도 서학이 전래되었으며, 이는 오랫동안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끌게 되었다. 이와 함께 표착인(漂着人)들도 서양 문물을 전했지만, 그 폭이나 기간에서 볼 때 연행사들의 활동에 비해 크게 미약하였다.
조선에 전래된 서학 내용은 1603년(선조 36)에 처음 나타났다. 이해 북경을 다녀온 사신 이광정(李光庭, 1552~1627)과 권희(權憘, 1547~1624)가 중국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한자명:利瑪竇)의 세계지도와 서학서들을 홍문관(弘文館)에 전했다는 것이다. 이후 조선에 전래되는 서학의 폭과 양은 점차 확대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조선의 위정자나 지식인들이 관심을 기울인 내용은 세계지도와 지구론, 그리고 책력 제작에 필요한 천문ㆍ역법이었다. 그 결과 조선의 지식인들은 전통의 천원지방(天圓地方) 이론과 천동설(天動說), 중화주의에 바탕을 둔 지리관 등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지리ㆍ천문관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조정에서는 1653년 1월 시헌력(時憲曆)의 시행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서학 수용론은 홍대용(洪大容, 1731~1783, 호:湛軒),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호:燕巖), 이덕무(李德懋, 1741~1793, 호: 雅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 호:楚亭) 등 북학론자들에 의해 해외 통상론이나 선교사 초빙론으로 발전하였다.
기호남인에서는 이익(李瀷, 1681~1763, 호:星湖)이 일찍부터 서양의 지리관과 세계지도를 통해 중화주의 세계관을 극복하고, 보유론(補儒論 : 유교의 미비점을 보완해 준다는 이론)이 함축되어 있는 마테오 리치의 교리서인 ≪천주실의(天主實義)≫와 판토하(D. Pantoja, 龐迪我, 1571~1618)의 윤리서인 ≪칠극(七克)≫ 등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유교의 ‘상제(上帝)’를 마테오 리치의 ‘천주(天主)’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어 그의 제자 윤동규(尹東奎, 1695~1773, 호:邵南), 이병휴(李秉休, 1710~1776, 호:貞山), 안정복(安鼎福, 1712~1791, 호:順庵) 등이 서양의 세계지도와 천문ㆍ역법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성향은 성호학파의 3세대 인물들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貞軒)은 서학의 천문·지리·기하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이벽(李檗, 1754~1785, 호:曠菴)과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은 서양의 역법·수학은 물론 마테오 리치가 지은 ≪기하원본(幾何原本)≫의 원리를 궁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승훈(李承薰, 1756~1801, 호:蔓川)과 정약용도 서양의 수학이나 과학ㆍ기술에 관심을 갖고 서학서를 접한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천주교는 오랫동안 호기심 이상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며, 신후담(愼後聃, 1702~1761, 호:河濱)이나 안정복에 의해 논리적으로 비판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이병휴와 권철신(權哲身, 1736~1801, 호:鹿庵)으로 이어지는 혁신적인 성향을 이어받은 이벽에 의해 천주교가 서양의 새로운 종교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1779년 겨울 권철신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강학 모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고, 1784년 봄 이승훈이 북경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고 돌아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겨울에는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식이 열렸으니, 이것이 곧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다. 여기에는 이승훈과 이벽을 비롯하여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權日身, 1742(1751)~1791, 호:稷庵), 정약전ㆍ정약용 형제가 참석했는데, 이때 정약전만은 세례를 받지 않았다.
천주교의 수용과 전파는 척사론(斥邪論)이 비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서학 수용의 폭은 점차 좁아지게 되고, 신서파(信西派)나 온건론자들에 대한 노론계와 공서파(攻西派)의 정치적 공격은 탕평(蕩平)의 일각을 담당해 오던 남인들의 정치적 입지마저 위태롭게 하였다. 1785년 봄 서울 명례방(明禮坊)에서 있은 천주교 집회가 발각된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 일명 명례방사건), 1787년 이승훈ㆍ정약용 등이 성균관 인근의 반촌(泮村)에서 천주교 서적을 공부한 사실이 폭로된 반회사건(泮會事件), 1791년 제사를 폐지한 윤지충(尹持忠, 1759~1791, 자:禹用)ㆍ권상연(權尙然, 1751~1791)이 전라도 진산에서 체포되어 전주에서 처형된 진산사건(珍山事件), 1795년 서울 계동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세례명:야고보)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북산사건(北山事件) 등이 바로 천주교와 관련된 사건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학론자들의 서학 수용론도 그 입지를 잃게 되었고, 온건한 척사론을 표방하던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 1720~1799, 호:樊巖)과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가 차례로 사망한 뒤에 일어난 1801년의 신유옥사(辛酉獄事)는 서학의 흐름을 종교운동 일변도로 흐르게 하였다.
정약용은 만 15세 때인 1777년(정조 1) 이익의 유저를 읽으면서 처음 서학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서구 문물과 관련된 서학서를 구해 읽는 데 열중하였고, 그 과정에서 서양 선교사들과 천주교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에게 천주교를 새로운 종교로 이해시켜 준 사람은 인척이자 절친한 학문 동료였던 이벽으로, 그 시기는 만22세 때인 1784년이었다. 이어 정약용은 같은 해 겨울에 있은 세례식에서 약망(若望: 세례명 요한의 한자 표기)을 세례명으로 정하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정약용은 열심히 교회 활동에 참여하다가 1787년 반회사건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에 앞서 형 정약전은 1786년 이후로 시행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일반 신자들이 임의로 신부를 임명한 성직제도) 아래서 신부로 활동하였고, 아우인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세례명: 아우구스티노)을 천주교에 입교시킨 일도 있었지만, 반회사건 이후로는 교회를 멀리하였다. 반면에 정약용은 1795년의 북산사건 때 충청도의 금정(金井) 찰방(察訪)으로 좌천된 이후에야 비로소 교회와의 결별을 결심했으니, 여기에는 정조나 채제공에 대한 애정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가환ㆍ이승훈과 함께 ‘사학(邪學)의 3흉’으로 지목되어 진퇴를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801년의 신유옥사는 정약용의 집안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형 정약종과 그의 장남 정철상(丁哲祥, ?~1801)은 처형되고, 정약전과 정약용은 각각 신지도와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옥사 즉 백서사건(帛書事件) 때 각각 흑산도(黑山島)와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다. 한편 교회 기록에는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부터 재개한 교회 활동 내용이 나타나고 있다.
정약용은 서학을 통해 무엇보다도 먼저 지리적 화이관을 극복하고, 지원설(地圓說)을 이해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직접 <지구도설(地球圖說)>을 짓기도 하였다. 또 그는 기술 개발의 중요성과 부국강병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용감(利用監)의 신설을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1789년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놓을 때 그 방법을 진언하여 이용토록 했으며, 1792년 정조로부터 받은 테렌쯔(J. Terrenz, 登玉函)의 ≪기기도설(奇器圖說)≫을 기초로 <기중도설(起重圖說)>을 짓고 기중기(거중기)를 고안하여 수원 화성 축조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서양의 과학 기술을 실제에 응용했다.
정약용의 경학에는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의 내용과 유사한 점이 많다. 첫째, 정약용은 우주 만물론에서 물종(物宗)의 가름을 “자립자(自立者)”와 “의뢰자(依賴者)”로 구분했으며, 서양의 ‘4원설(四元說: 화·기·수·토의 네 가지 원소가 만물의 근원이라는 이론)’에서 영향을 받은 ‘사정괘론(四正卦論)’을 내세웠다. 둘째, 마테오 리치의 천관이나 상제론에서와 같이 상제의 유일성을 중시하고, 상제천(上帝天)에 창조성ㆍ인격성과 전지전능함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상제와 인성을 동일한 “영명무형(靈明無形)”으로 이해하였다. 셋째, 심성론에서는 천부인성설(天賦人性說)을 주장하면서 도심을 통해 인심과 천명이 연결된다고 했으며, 마테오 리치의 ‘삼혼설(三魂說: 영혼은 초목ㆍ금수ㆍ인간의 혼으로 구분된다는 이론)’과 유사한 ‘성삼품설(性三品說: 본성은 초목ㆍ금수ㆍ인간의 본성으로 구분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 이처럼 그는 서학에서 영향을 받아 새로운 우주만물론과 심성설을 주장하고, 하느님이라는 존재(存在)를 중시했지만, 당위(當爲)에 바탕을 둔 전통 윤리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명ㆍ청 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 후기의 서학에도 일정한 한계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조선에 전래된 한역 서학서들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교(傳敎)를 위한 방편으로 저술한 것이어서 근대 유럽의 학문을 그대로 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역 서학서들에는 중세 스콜라(Scholar) 학파의 철학ㆍ종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ㆍ기술 문화가 뒤섞여 있었기에 번역 문화의 성격과 그에 따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학은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으로 불릴 만큼 조선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식인들로 하여금 전통 세계관을 극복하도록 했으며, 서구의 근대 과학에도 눈을 뜨게 해주었으며, 새로운 가치 체계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반면에 정약용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천주교 탄압은 사상의 폭을 좁히는 결과로 작용했다. 천주교 탄압 정책은 천주교를 순수한 종교운동으로 전환시키면서 정교(政敎) 분리의 틀 안에 가두어버렸고, 이로 인해 서구 근대 문화의 수용과 변화의 기운은 잠시 소멸된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잠재되어 있던 서학 사상은 19세기 말 개항ㆍ개화 사상의 발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차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