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 朱子學
중국 남송(南宋) 시대 주희(朱熹, 1130~1200, 호:晦庵)가 불교(佛敎)의 심성론(心性論), 도가(道家)의 본체론(本體論) 등을 집대성하여 유학을 철학 중심으로 새롭게 정립한 사상 체계.
주희는 이른바 북송오자(北宋五子)로 불리는 주돈이(周敦頤, 1017~1073, 호:濂溪), 소옹(邵雍, 1011~1077, 호:康節), 장재(張載, 1020~1077, 호:橫渠), 정호(程顥, 1032~1085, 호:明道), 정이(程頤, 1033~1107, 호:伊川)의 사상을 집대성였다. 그는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소옹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장재의 기론(氣論), 정호ㆍ정이의 천리(天理) 개념을 계승하여 종합적 체계를 이루었다. 이로써 그는 맹자(孟子, 기원전 372 ~ 기원전 289 추정) 이후 오랫동안 단절되던 도통(道統)의 계승자로 자부하였다. 이러한 주자학은 시대와 학자, 대표개념 등에 따라 정주학(程朱學), 리학(理學), 정주리학(程朱理學), 성리학(性理學), 송명리학(宋明理學), 신유학(新儒學) 등으로 불린다.
주자학의 학문체계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우주의 기원 및 변화과정과 원리를 설명하는 리기본체론(理氣本體論), 리기론을 중심으로 인간의 도덕적 선악의 근원과 마음의 원리를 설명하는 인성론(人性論), 성선(性善)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군자(君子)나 성인(聖人)이 되기 위한 수양론(修養論), 사물의 실상과 도덕적 시비를 판단하는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 즉 지식론이다. 이러한 네 가지 형이상학의 문제에 대한 설명의 과정에서 많은 논쟁이 벌어졌으며, 입장의 동이(同異)에 따라 다양한 학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정약용의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
정약용은 주자학이 원시 공맹유학(孔孟儒學)의 본질을 벗어났다고 비판하였다. 정약용의 주자학 비판의 요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리학(義理學)을 중심으로 해석한 주희의 경학에 대한 비판이다. 정약용은 사서(四書)보다는 육경(六經)을 중시하였고, 주희의 송학(宋學)을 넘어 훈고학(訓詁學)과 고증학(考證學)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새로운 경학체계를 정립하였다. 정약용은 공자(孔子 = 丘, 기원전 551 ~ 기원전 479, 자:仲尼)의 성인(聖人)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수사학(洙泗學)의 정신을 찾아야 하였다고 역설하였다.
둘째, 주자학의 리기론(理氣論)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특히 리(理)의 주재성(主宰性)을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주희가 말한 리(理)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드시 도덕적 선(善)을 실천하도록 주재(主宰)하지 못하므로 상벌을 주도하는 ‘상제(上帝)’의 주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주희의 ‘리법으로서의 천[理法天]’을 부정하고 ‘상제로서의 천[上帝天]’을 강조하였다.
셋째, 주자학의 인성론을 비판하고 매우 다른 인성론을 제시하였다. 주자학에서 성선(性善)은 모든 사람에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보편적 원리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모든 인간은 선을 행하고 싶어 하고 악을 싫어하는 기호를 가지고 있다는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하여 주자학과는 다른 인성론을 제시했다.
넷째, 주자학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명제를 부정하고 자연의 원리와 인간의 원리는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와 같이 주자학을 비판하였지만 여전히 주자학에 대한 긍정적 입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은 주희가 공맹 이후 유학의 도통을 계승하였다고 보아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에서는 “유학 중흥의 조종”이라고 칭송하였고, <오학론(五學論)>에서는 “성리학은 진리를 알고 스스로 노력하고 실천하는 학문이다.”라고 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주자학과 다산학의 관계에 관한 입장들]
주자학과 다산학의 관계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다산학에 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부터 천관우(千寬宇, 1925~1991),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정인보(鄭寅普, 1893~1950, 호:爲堂) 등에 의해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1950~1960년대에는 전해종(全海宗), 이우성(李佑成) 등이, 1970~1980년대는 한우근(韓佑劤, 1915~1999), 한영우(韓永愚), 홍이섭(洪以燮, 1914~1974), 황원구(黃元九), 김태영(金泰永)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이고, 철학 분야에서 다산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이후부터였다. 이을호(李乙澔, 1910~1998), 윤사순, 금장태 등은 사상사적 관점에서 조선성리학과의 차별을 드러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2000년을 전후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학자들이 다산학을 연구함으로써 다산학의 성격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제시되었다.
주자학과 다산학의 관계에 대한 평가의 대표적인 견해를 정리하면 첫째, ‘반주자학(反朱子學)’ 혹은 ‘탈성리학(脫性理學)’이라는 관점이다. 송학을 개조한 학문이라는 뜻으로 이을호(1971)는 ‘개신유학’이라고 하였고, 또한 이을호, 이남영, 윤사순, 금장태 등은 ‘반주자학’, ‘탈성리학’이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반해 류인희는 다산학은 ‘성리학의 연장’으로 평가하였는데, 이러한 입장은 성리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주자학과 다산학의 구분에 관여하는 중요 개념은 ‘실학(實學)’이다. 일반적으로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1950년대 사회개혁의 근거를 찾던 초기의 다산학 연구자들이 18세기를 전후한 일련의 개혁사상가들의 사상을 실학으로 규정하기 시작한 후 실학의 개념은 학계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실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되었다. 손흥철(2009)은 “다산학을 실학이라는 용어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라고 보았으며, 이정우(2011)는 “다산학도 중세의 이념적 봉건성을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근대철학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모자라는 점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주자학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은 여러 가지 학술사적 의미를 가진다. 주자학은 13세기부터 800여 년 간 동아시아의 정치ㆍ사상ㆍ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한국의 조선시대는 거의 500여 년 간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이 주류를 이루었다. 여기에는 주자학의 이론적 발전이라는 긍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주자학 이외의 학문이 다양하게 공존할 수 없는 학문적 배타성의 형성이라는 부정적 측면도 존재하였다. 이른바 ‘사문난적(斯文亂賊)’에 대해 정죄하는 상황에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17ㆍ18세기 조선사회의 사회적 모순이 광범위하게 드러나게 됨에 따라 조금씩 주자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사상을 집약하여 정약용은 주자학 전반에 대한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비판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다산학은 주자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주자학과 다산학을 연구하고 평가하는 이전과는 새로운 지평이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이나 다산학을 평가함에 실학(實學)과 허학(虛學),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경향은 그 자체로도 방법론 및 이론상으로도 문제가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손흥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