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학 茶山學

정약용의 학문과 사상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개념.

정약용은 방대한 분량의 저술을 남겨 하나의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형성하였다. 이를 학계에서는 다산학이란 개념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연구개념으로 주자학(朱子學)ㆍ양명학(陽明學)ㆍ원효학(元曉學)ㆍ퇴계학(退溪學) 등이 있다.

[다산학의 성격]

다산학은 실학(實學)의 범주에 속하는데, 실학은 유학의 한 조류에 해당하므로 다산학 또한 큰 틀에서는 유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임은 물론이다. 성리학(性理學) 역시 유학의 한 조류인데 성리학과 실학-다산학은 상호 연관성과 함께 변별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17세기 이래 유입된 서학(西學)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유학과 다산학

다산학은 유학의 틀을 떠나서 성립한 것이 아니며 유학의 발전과정상에서 출현한 것이다. 유학의 경전 해석을 통해서 사상적 입지와 실천적 방향을 설정한 점이 특징이다. 정약용은 학문의 궁극적 목적지를 ‘요순(堯舜)’으로 잡고 ‘요순의 문[堯舜之門]’으로 들어가기 위해 공자(孔子 = 丘, 기원전 551 ~ 기원전 479, 자:仲尼))의 가르침을 올바로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기 때문에 그의 학문은 수사학(洙泗學)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이점에 있어서 유교적 상고주의(尙古主義)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다산학이 표방한 복고(復古)는 문자 그대로 과거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유학의 자기 혁신을 위한 방법론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다산학은 개신유학(改新儒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성리학과 다산학

성리학은 송대(宋代)로 와서 새롭게 성립한 학문체계이다. 이 성리학이 고려 말에 수용되어 조선시대에는 주류적인 학문사상으로 연구가 심화되고 위상이 확고하게 되었다. 조선조 5백연동안에 성리학이 주류적인 교학(敎學)으로서 국교(國敎)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쟁점 사안의 하나이다.
실학의 인식과정상에서 초기에는 대체로 실학을 성리학에 대립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을 취했다. 17세기 이래 크게 달라진 시대상황에서 성리학과 결별하여 새로운 학문의 길을 개척한 것이 실학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실학의 성격을 반(反) 성리학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견해가 우세하였다. 이처럼 실학을 성리학과 단절시켜 보는 관점에 대해서 20세기 말경부터 수정주의적인 견해가 제기되었다. 실학의 연원을 성리학에서 찾은 것이다. 한국학술사에서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것은 16세기의 성리학이다. 다음 17세기로 들어와서 발흥한 실학은 성리학이 축적한 고도에서 형성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실학자들의 학통이 대체로 전대 성리학자로 이어진 사실이 확인된 한편, 학문의 내용면에서도 접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약용은 실학사에서 중요한 존재인 이익(李瀷, 1681~1763, 호:星湖)의 학문 성격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으로 날줄(經)을 삼고 정치경제의 학문으로 씨줄(緯)을 삼았다”(<상목재서(上木齋書)>)고 지적한바 있다.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면서 실학적인 면으로서 경세학(經世學)을 추구했다는 의미이다.
다산학은 퇴계학에 연결고리가 있으며, 성격 또한 ‘반 주자학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다산학을 성리학의 일부이거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다산학은 두 가지 점에서 성리학과의 변별성이 뚜렷하다. 첫째는 경학(經學)의 측면이다. 다산학은 근본을 경학에 두고 있는바 정약용은 주자학의 사서(四書)ㆍ삼경(三經)을 중심에 놓고 해석하는 방식과는 전면적으로 다른 경전인식의 논리를 제시한 것이다.
둘째는 성리학적인 리(理)와 기(氣) 개념을 학문의 중심에 두지 않은 점이다. 성리학은 일명 ‘리학(理學)’이라고 일컫듯 ‘이’ 개념이 핵심인데 정약용은 ‘이’ 자체를 사물의 조리(條理)로 풀이하고 절대자로서 ‘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산학으로 와서는 성리학적인 학문의 틀을 탈피한 것이다. 철학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실학을 성리학과 단절시켜 보는 관점에 대해서 20세기 말경부터 수정주의적인 견해가 제기되었다. 실학의 연원을 성리학에서 찾은 것이다. 16세기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 단계에 접어들었고, 17세기 실학의 발흥은 성리학이 축적한 고도에서 형성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실학자들의 학통이 대체로 전대 성리학자로 이어진 사실이 확인된 한편, 학문의 내용면에서도 접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약용은 이익의 학문 성격을 “회재(晦齋, 이언적)와 퇴계(退溪, 이황)의 학문으로 날줄(經)을 삼고 정치경제의 학문으로 씨줄(緯)을 삼았다(<상목재서(上木齋書)>).”고 지적한바 있다.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면서 실학적인 면으로서 경세학(經世學)을 추구했다는 의미이다.
다산학은 퇴계학과 연결고리가 존재하며, 그 성격 또한 ‘반 주자학적’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학을 성리학의 일부이거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다산학은 두 가지 점에서 성리학과의 변별성이 뚜렷하다. 첫째는 경학(經學)의 측면이다. 정약용은 학문의 근본을 경학에 두고 사서(四書)ㆍ삼경(三經)을 중심으로 논의하면서도 주자학의 해석 방식과는 전면적으로 다른 경전인식의 논리를 제시하였다.
둘째는 성리학적인 ‘리(理)’와 ‘기(氣)’ 개념을 학문의 중심에 두지 않은 점이다. 성리학은 일명 ‘리학(理學)’이라고 일컫듯 ‘리’개념이 핵심인데 정약용은 ‘리’ 자체를 ‘사물의 조리(條理)’로 풀이하고 절대자로서 ‘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다산학 단계에 오면 성리학적 학문의 틀을 탈피한 것이다.

실학과 다산학

실학은 17세기 이래 발흥한 신학풍을 가리키는 것이다. 17세기는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일대 역사전환기였다. 임진왜란(1592~1598)으로 막이 열린 17세기는 먼저 일본에서 에도(江戶) 막부(幕府)가 들어서고 이어 중국에서 명청교체가 일어났다. 한편으로 16세기 말엽에 도착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은 계속 파고를 높여서 이 지역의 역사전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시대상황에 위기의식을 가지고 근본적인 대응책을 학문적으로 강구한 것이 다름 아닌 실학이다. 이 신학풍 역시 동아시아의 한중일 세 나라에 각기 양상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발생, 발전하였다.
한국의 경우 유형원(柳馨遠, 1622~1673, 호:磻溪)이 ≪반계수록(磻溪隨錄)≫을 집필하였는데, 그는 한국 실학의 개창자로 평가된다. 유형원의 실학은 이익으로 이어져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제도 개혁과 체제 개편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기에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로 일컬어지며, 이 학파의 대종(大宗)이 이익이기에 그의 호를 따서 성호학파(星湖學派)라고 불리기도 한다. 성호학파와는 구별되는 실학의 한 유파가 18세기 후반에 성립된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호:燕巖)을 중심으로 하는 연암학파(燕巖學派)이다. 연암학파는 기술발전과 생활 향상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기에 이용후생파(利用厚生派)로 일컬어진다. 이용후생을 실행하기 위해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의 도입을 역설하였던 까닭에 북학파(北學派)라고도 불린다. 정약용은 성호학파의 유력한 계승자로, 경세치용을 중심과제로 삼고 한편으로는 연암학파의 이용후생적 사고와 이론을 수용하였다. 경세치용파와 이용후생파의 학술이 다산학에서 종합되기에 이른 것이다. 다산학은 17세기 이래 발흥한 실학의 제반 성과와 이론을 집대성한 성격을 띠었다. 이것이 한국실학사에 있어서 다산학의 위상이다.
동아시아 실학의 지평에서 보면 다산학은 중국 청대 실학의 성과들을 두루 섭렵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일본 에도시대의 고학파(古學派) 경학의 저술까지도 참조하였다. 그런 점에서 다산학은 동아시아적 차원에서도 평가할 수 있다.

서학과 다산학

서학이 한반도에 유입된 것은 17세기 초엽인데 문제시되기는 18세기 말엽부터였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학의 서적들은 대체로 지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는데 종교로서 작동함에 따라 이단시되고 탄압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1791년의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최초의 천주교탄압으로 기록되었고, 1801년에 일어난 신유옥사(辛酉獄事)는 규모가 크고 정치적 파장도 컸다. 정약용은 바로 이 시점에서 활동하여 깊은 관계를 가졌다. 그의 친인척과 당파적으로 가까운 인사들이 신유옥사에 걸려서 죽거나 추방을 당했는데 정약용 또한 유배형에 처해져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정약용은 20대의 젊은 시절에 서학서를 접해서 탐독하였고 신앙심까지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진산사건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회개하고 신앙을 버렸음을 자백하였다(→ 변방사동부승지소, 자찬묘지명). 정약용이 스스로 증언했던 것처럼 천주교에 입문했다가 이탈한 것은 사실이므로 다산학에서 서학의 영향이 없었던 일처럼 지워지기를 상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산학에 미친 서학의 영향은 두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서학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점이다. 그는 서양의 수학과 과학ㆍ천문학 등을 이해하여 종래의 미신적 사고를 배격하고 우주 자연에 대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인식과 사고를 하게 되었다. 기중기를 개발해서 수원 화성(華城)을 축조하는데 공헌한 사실은 그 구체적인 사례이다(→ 기중도설). 둘째, 서학의 종교 철학을 내면화한 점이다. 정약용은 서교로 들어갔다가 유교로 돌아왔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거쳤던 서교의 논리가 유교 경전의 해석에 투영되었다. ‘천관(天觀)’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성리학적인 ‘천리(天理)’개념을 부인하고 인격신적인 ‘상제(上帝)’ 개념을 호출한 것이다. 다산 경학의 핵심인 천관은 유교의 고대적인 천관을 회복한 것이지만, 서학의 천주(天主) 개념을 수용한 형태이다.

[다산학의 체계]

다산학의 실체는 다른 어디가 아니고 그 자신의 저술 속에 담겨 있다. ≪여유당전서≫ 및 ≪여유당전서보유(與猶堂全書補遺)≫이 그것이다. 다산학은 방대하여 거의 지식의 전 영역을 망라하고 있지만 백과전서식으로 나열된 형태가 아니며 일정한 체계를 갖추었다.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이 한평생을 바쳐서 성취한 학문을 “육경(六經)ㆍ사서(四書)에 대한 연구로 수기(修己)를 삼고 일표(一表)ㆍ이서(二書)로 천하국가를 위하였으니 본말(本末)을 구비한 것이다.”고 술회한 바 있다. ‘수기(修己)=본(本)’은 주체의 확립을, ‘치인(治人)=말(末)’은 사회적 실천을 뜻하는 유교의 기본 패러다임이다.‘수기=본’과 ‘치인=말’의 구도는 체용(體用)의 논리이다. 양자는 경중과 우열을 구별할 성질이 아니다. 어느 한편도 결여되어서는 안 되는, 요컨대 하나의 전체이다. 이 구도에서 전자를 육경ㆍ사서의 경학으로, 후자를 일표이서의 경세학으로 설정한 점이 다산학의 특징적인 성격이다.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에서 언표한 체계는 다산학의 전체내용을 포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육경ㆍ사서에 대한 주해와 일표ㆍ이서의 저술은 그 자신이 추구한 학문의 중심을 들어서 말한 것이며, 그의 저작목록의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유당전서≫의 편차에서 경집과 함께 예집(禮集)ㆍ악집(樂集) 또한 ‘본’에 속하고 있다. 악집의 내용은 ≪악서고존(樂書孤存)≫이라는 음악의 저술인데 정약용은 음악을 단순한 예술로 보지 않고 성왕(聖王)의 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기본적 요목으로 사고하였다. 이처럼 경세치용을 학문의 목적으로 생각하면서 그 근본으로 경학 및 예와 악을 연구한 것이다.
다산학의 실천 영역은 정법집(政法集) 외에도 지리집(地理集)ㆍ의학집(醫學集) 등을 들 수 있다. 지리집에는 역사지리학에 속하는 ≪(아방)강역고( (我邦)疆域考)≫와 하천에 관련된 ≪대동수경(大東水經)≫이 포함되어 있다. 의학집의 ≪마과회통(麻科會通)≫은 당시 유아 사망의 제1원인인 천연두 퇴치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밖에도 시문(詩文)에 속하는 저작물이 ≪여유당전서≫의 제1집 및 ≪여유당전서보유≫에서 2책을 차지하고 있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정약용은 “정언묘오(精言妙悟)로 옛 성인의 본뜻을 얻은 것”이란 의미를 부여하였다. 기본적으로 도본(道本)의 관점에 서 있으면서 인간의 정서적인 면을 중시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ㆍ≪흠흠신서(欽欽新書)≫는 ‘정법삼서(政法三書)’라고 하여 다산학에 있어서 사회적 실천의 중심에 해당한다.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면, ≪경세유표≫는 국가제도 전반의 개혁을 위한 설계도를 기획하였고, ≪목민심서≫는 개혁을 당장 실현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여 현행의 제도를 바탕으로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한 지방행정의 방법을 치밀하게 강구하였으며, ≪흠흠신서≫는 인명에 관계되는 형사사건을 다루었다. 요약하자면, 다산학은 경학을 근본으로 해서 국정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인민을 구제하는 일을 급선무로 강구한 학문체계라 할 수 있다.

[다산학의 정치적 실현문제]

다산학의 직접적인 계승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산학단(茶山學團)을 거론하는 것이 필요한데, 다신학단이 항목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여기서는 다산학의 정치적 실현에 관련한 문제를 서술한다.
다산학은 본래 당면한 시대상황이 시급히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현실인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기의 필생의 노고를 바친 저술이 널리 읽혀져서 현실적으로 의미를 갖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다. 그러나 이 소망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다산학은 그 주체가 정치현실로부터 소외된 처지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정치행위로 연결될 통로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상태였다. 그의 저술한 책 자체가 발간이 되지 못하고 서고에 파묻혀 있어야 했다. 다산학의 정치적 실현은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저술 중에서 ≪목민심서≫와 ≪흠흠신서≫가 비교적 널리 보급되었다. ≪목민심서≫는 지방행정에 관한 내용이고 ≪흠흠신서≫는 인명에 직결된 옥사에 절실한 내용이기에 당파가 다른 쪽 사람들까지도 챙겨 보았다고 한다.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다산학이 현실에 적용되었던 사례로 들 수 있다.
정약용의 저술이 정치권에서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그의 사후에도 반세기를 경과해서의 일이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이 국정전반의 개혁을 시도하면서 ≪여유당집(與猶堂集)≫을 올리도록 명하고(1885~1886년) 그와 동시대에 살지 못함을 탄식했다는 것이다. 다산학의 개혁안을 반영하여 전국을 13부제(府制)로 개편하였다. 다음 광무(光武) 시기에 온건개화파가 개혁을 주도하면서 내세운 ‘구본신참(舊本新參)’은 실학-다산학에 뿌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사]

다산학을 인식하고 연구한 역사는 실학과 그 궤도를 같이하였다. 다산학은 실학연구의 중심으로서 선도해온 것이다.
다산학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른 시점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무렵인데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연구사는 대략 4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각기 경위 및 인식방향, 연구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 1900년 전후

1894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이 단계는 내부적으로 문물제도의 개조를 서두른 ‘변역(變易)의 시대’인 동시에 외세의 침탈로 주권을 상실하게 된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 시점에서 조선왕조는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변신, 연호를 광무(光武)로 삼고 ‘광무개혁’을 시도하였다. 한편 구국과 계몽을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단계에서 실학에 해당하는 내용이 개혁을 위한 자원으로 등장하였다. 광무 연간의 정부를 대변하는 입장이었던 ≪황성신문(皇城新聞)≫은 “중고(中古)이래로부터 정치가에 속하는 인물을 들어 말하면 김잠곡(金潛谷) 육(堉)씨, 유반계(柳磻溪) 형원(馨遠)씨, 이성호(李星湖) 익(瀷)씨, 정다산(丁茶山) 약용(若鏞)씨, 박연암(朴燕岩) 지원(趾源)씨 같은 네 다섯 선배가 있어 경제정치학(經濟政治學)으로 모두 표표하여 뚜렷하게 일컬어지는데 그중 입언저서(立言著書)로 가장 풍부하기는 오직 다산공이 으뜸이다”(1902년 5월 19일자) 라고 하였다. 위에 호명된 김육으로부터 박지원ㆍ정약용에 이르는 인물들은 바로 실학자로 일컫는 존재이다. ‘치평(治平)의 실학’(당시 발간된 ≪목민심서≫의 發凡)이라고 한 용례가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실학이 용어로서 아직 정착되지 않았으며, ‘정치학’, 혹은 ‘경제(經濟, 경국제세의 의미) 정치학’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목민심서≫를 가리켜 “우리 대한제국의 정치학 가운데 제일 신서”(위의 글)라고 평가했다. 이 학문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정약용이 중시된 것이다.
정약용의 ‘정법 3서’로 일컬어진 ≪목민심서≫ㆍ≪흠흠신서≫ㆍ≪경세유표≫가 당시에 간행되었던 데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다. 장지연(張志淵, 1864~1921, 호:韋庵)은 ≪(아방)강역고≫를 수정ㆍ증보하여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란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제2단계 1930년대

1930년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강고히 하는 시점에서 민족의 정체성 위기를 체감하여 우리의 언어를 지키고 역사와 문화를 조사ㆍ연구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런 학계의 동향에 언론도 “조선을 알자, 조선의 과거 및 현재를 따져서 미래의 광명을 밝히자” (≪동아일보≫ 1935년 신년호)고 적극 호응하였다. 이른바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이다. 당시에는 주권을 상실한 처지였으므로 ‘국학(國學)’이란 개념을 쓰지 못하고 조선학으로 표방한 것이었다. 곧 한국의 근대학문이 본격적으로 출범한 지점이 되었다. 이 단계에서 조선학의 뿌리로 실학-다산학이 발견되었다. 당시 조선학을 제창한 정인보(鄭寅普, 1893~1950, 호:爲堂)는 ‘조선학에서 정다산의 지위’를 거론하여 조선학은 정다산에서 시작하자고 역설했다.(≪신조선≫ 1934년 10월호) 정인보와 함께 조선학의 주도자로 활약했던 안재홍(安在鴻, 1891~1965) 또한 유형원을 ‘조선학의 창시’, 이익을 ‘조선학의 확립’으로 설정, 조선학을 집대성한 공적을 정약용에 돌려서 본격적인 출발선을 다산학으로 잡았다(<조선사상에 빛나는 다산 선생의 學과 생애>). 마침 1936년이 정약용 서거 100주년이 되어, 그 기념사업으로 ≪여유당전서≫를 발간하면서 이를 계기로 조선학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앞의 제1단계에서 다산학은 현실적용에 필요한 실천적 과제로 중시되었는데 제2단계로 와서 다산학은 학문연구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1단계에서 ‘정치학’으로 호명되었던 것이 2단계로 와서 ‘정치학’이란 용어는 자취를 감추고 실학이란 개념으로 일컫게 되었다. 그 중간에 ‘경제고거학(經濟考據學)’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 ‘현실학’ (백남운(白南雲, 1894~1979)의 ≪조선경제사≫), 혹은 ‘실사구시학(實事求是學)’ 등의 개념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결국 실학이 용어로서 일반화되었다.
2단계의 주요 실적으로는 ≪여유당전서≫ 76책의 편찬, 간행을 손꼽아야 할 것이다. 이에 비로소 다산학은 그 전모가 드러나 전면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 신조선사(新朝鮮社)가 주체가 되어 1934~1938년에 발간사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신조선(新朝鮮)≫이란 잡지를 발간, 다산학을 해명하는 이론적인 작업을 수행했다. 이밖에 중요한 연구성과로는 정인보의 <다산 선생의 생애와 업적>(≪신동아≫ 1935년 9월호), 최익한(崔益翰, 1897~?))의 <여유당전서를 독(讀)함>(≪동아일보≫ 1938~1939년, 65회 연재)을 들 수 있다.

제3단계 1945년 이후

해방 후 한반도는 분단으로 되었으나 실학-다산학 연구는 남북한 모두 관심을 가진 분야였다. 이 시기 들어서는 기본적으로 전단계의 실학과 다산학에 대한 인식, 즉 학술적 대상으로서의 실학과 다산학의 발견이라는 인식을 계승하면서 본격적인 연구를 수행하였다.

남한의 다산학 연구

근대적인 분과체계로 성립한 단계에서 실학연구는 역사학이 주도하여 다산학에서 진취적이고 개혁적인 측면이 중시되었다. 천관우(千寬宇, 1925~1991)의 <반계 유형원 연구: 실학발생에서 본 이조사회의 일 단면>(1952~1953)은 역사적 관점에서의 실학연구의 출발점이 되었고, 이우성(李佑成)의 <실학연구 서설>(1973)은 실학에 대한 체계적 인식을 제공한 것으로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역사학회편의 ≪실학연구입문≫(1973)은 그야말로 실학의 입문서로서 기여한 것이었다. 다산학에 국한해서 보자면 홍이섭(洪以燮, 1914~1974)의 ≪정약용의 정치경제 사상연구≫(1959)는 다산학의 경세적인 측면에 관한 연구의 첫 사례였다.
이후 조선의 정치ㆍ경제적 변화와 개혁론의 측면에 초점을 두고 정약용의 토지제도 및 농업문제를 다룬 연구로는 김용섭(金容燮)의 ≪한국근대농업사 연구≫ I (1976)가 대표적이다. 다산연구회는 ≪목민심서≫의 역주작업을 공동으로 다년간 수행하여 전6책으로 간행하고, 그 결과물로 11명의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다산정치경제사상≫(1990)으로 펴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게 된 것은 1970~80년대로, 다산학연구에서 후발로 착수되었지만 성과가 있었다. 사회비판적인 성격으로 ‘다산시(茶山詩)’가 먼저 주목받았으며, 산문으로도 관심이 확산되었다. 실학파문학으로서의 특성을 해명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문학론 및 미학이 조명을 받았다.
경학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을호(李乙浩, 1910~1998)의 ≪다산경학연구(茶山經學硏究)≫(1966)가 제출되었으나 관심권 밖에 놓였다가 1990년대를 전후해서부터 연구 및 번역작업이 이루어졌다. 다산학의 체계적 인식에 경학연구가 필수적인 과제임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3단계의 실학연구를 선도했던 천관우는 “그것(실학)은 근대적 지향의식과 민족의식의 두 척도를 아울러 충족시키는 경우가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한국실학사상사>, 1970)고 그 특징을 규정지었다. 실학이 크게 부각된 시점은 1960~1970년대인데 근대화론이 주도하는 시대상황과 관련이 없지 않았다. 식민사관의 극복과 연관해서 ‘내재적 발전론’을 학적 사고에서 중요하게 여겼다. 실학담론은 이후 널리 호응을 받았는데 그 핵심인 ‘근대지향’과 ‘민족의식(民族意識: nationalism)’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민족의식 또한 근대적 속성이므로, 이 단계에서 실학담론의 요점은 근대주의에 있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북한의 다산학 연구

북한의 학계에서 다산학의 연구성과는 최익한의 ≪실학파와 정다산≫(1955)이 첫 번째로 손꼽히는데, 이것은 1930년대에 그가 발표했던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을 수정ㆍ보충한 것이다. 1962년에는 과학원철학연구소에서 북한학계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분야별로 집필한 ≪정다산 탄생 200주년 기념 론문집: 정다산≫이 간행되었다.
당시 남한과 달리 철학분야에서 실학-다산학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정진석(鄭鎭石)의 ≪조선철학사≫(1962)는 곧 일본에서 번역되어 소개되었고, 남한의 학계에도 상당한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다음 정성철의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사회과학출판사, 1974)는 실학의 전문적인 저술로서 역시 마찬가지로 일본을 매개로 남한학계에 소개되었다.
실학-다산학에 대해 북한학계는 일찍부터 민족문화의 유산으로서 높이 평가, 계승해야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삼으면서 실학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의 발언으로, “실학파가 그 당시 봉건사회에서 일정한 진보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 오늘날에 와서까지도 무슨 큰 의의가 있는 것처럼 볼 수 없다.”고 현재적 의의에 대해 한계를 분명히 그은 것이다. 이런 관점을 반영하여, “실학자들이 전개한 모든 이론과 사상도 역시 봉건유교사상에 기초한 것이었으며 양반 지배계급 안의 진보적 계층의 이익을 대변한 것”(≪조선전사(朝鮮全史)≫12, 1980)으로 규정지었다.
남과 북의 실학담론은 서로 체제와 이념을 달리한 만큼 입장차가 있다. 하지만, 다 같이 공유한 정신문화의 유산을 대해 이념적 대결의 이면에서 양측 사이에 통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실학을 과거적인 것으로 묶어 두려는 그 관점 자체도 근대주의의 한 변용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제4단계 20세기에서 21세기로 전환기

세기의 전환점은 전 지구적 차원의 변화가 진행된 시기로, 세기말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세계화(世界化, globalization)’ 현상이 급속히 전개된 한편 근대문명에 대한 반성적 사고와 노력이 공감대의 폭을 넓히는 형세이다.
실학은 조선후기의 신학풍을 지칭하는 개념이지만, 이를 학적으로 주목하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다시 말해서, 20세기의 한국역사가 실학을 정신적 가치로 호출한 것이다. 따라서 크게 달라진 21세기, 새천년이 개막되는 시대환경에서 실학-다산학은 20세기의 재판이 되어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음을 의식해야 했다.
실학 전반에 걸쳐 관심이 지난 세기말로 접어들면서 시들해지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인문학의 위기상황과도 관련되지만, 더구나 한국은 ‘근대화’의 과정을 통과해서 ‘선진화’로 달려야하는 지점에서 실학의 근대지향성은 매력을 갖기 어려웠다. 하지만 ‘세계화’의 추세에 역으로 우리의 문화전통에서 가치를 발굴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실학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특히 다산학에 관심이 가졌다.
이 시기에 특기할만한 사실은 실학-다산학 관련의 연구 기반이 유례없이 넓게 조성된 점이다. 연구자 단체로서 한국실학학회가 결성되어 전문 학술지로서 ≪한국실학연구(韓國實學硏究)≫를 발간하였다. 실학의 학습과 연구를 목적으로 한 실시학사(實是學舍)가 1990년에 발족, 2010년에 재단법인으로 출범하여 학술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다산학 관련의 법인체로서 다산학술문화재단(茶山學術文化財團)은 1998년에 설립되어 여러 가지 학술사업을 꾸준히 수행하고 학술지로서 ≪다산학(茶山學)≫을 발간하고 있다. 2004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다산학연구소’는 정약용의 훌륭한 정신과 다산학의 내용을 대중화하는 사업에 주력해왔다. 정약용의 유배지 강진군에서는 강진다산학술연구원을 설립,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의 협조를 받아 운영하고 있다. 한편 2009년에는 실학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실학박물관이 여유당(與猶堂)과 정약용 묘소 근처에 설립되었다.
2012년에 마침 정약용 탄생 250주년을 맞아서 여러 형태의 기념행사 및 학술사업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1930년대 정약용 서세(逝世) 100주년 행사가 개최되었던 것처럼 관 주도가 아닌 위의 여러 법인체 및 학회가 자율적으로 기획ㆍ추진하였으며, 언론과 대중의 호응이 크게 일어났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4단계에서 실학-다산학 연구는 앞의 3단계로부터의 연속성과 함께 경향을 달리한 측면이 혼합되어 있다. 방향 모색을 하고 새로운 시각이 도입된 사례 몇 가지를 들어둔다.

(1) 연구 분야가 다양화된 점이다. 종전에는 역사학이 주도했는데 역사학 쪽은 오히려 부진한 편이고 경학ㆍ문학을 비롯하여 법제사ㆍ행정학ㆍ의학 등 분야가 참여하고 있으며, 문화론적 접근이 관심을 끌고 있다.
(2) 동아시아적 시각이 도입된 점이다. 실학은 일국적 경계를 넘어서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고려되고 있으며, 동아시아 실학의 개념이 제기되었다.
(3) 근대주의를 비판, 극복하려 하는 점이다. 서구주도의 근대, 근대문명을 비판하고 극복의 방향을 고민하면서 실학-다산학에 대한 인식의 논리를 재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구 중심주의를 극복하고 문명사적 반성을 위한 정신적 자원으로서 다산학에 눈을 돌려 다시 읽게 되었다.

해외의 다산학 연구

다산학이 국제적으로 학적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세기말부터이다. 해외의 다산학 연구를 지역별 혹은 학문적 여건상의 차이에 따라 동아시아ㆍ북미ㆍ유럽으로 권역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한국과 인접한데다가 장구한 기간에 걸쳐 동일한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실학이라고 지칭한 학술사상이 중국이나 일본에도 동시기에 유사한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서 1990년부터 한ㆍ중ㆍ일 세 나라가 돌아가며 격년제로 ‘동아시아 실학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학술회의에 타이완(臺灣)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학자들이 동참하기도 했다. 실학의 인식이 일국적 경계를 넘어 동아시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구미지역의 실학-다산학 연구는 한국학의 일부로 이루어지고 있다. 유럽권에서 한국학은 그곳의 학문전통의 하나인 동양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북미권의 한국학은 대체로 동아시아학과 연계되어 있다. 동양학(동아시아학) 혹은 한국학은 지역학 개념이므로 실학-다산학 또한 지역학 개념에 포괄된 형태이다. 동아시아와 구미지역에서의 연구는 그 여건이나 의미가 같지 않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해외에서 수행된 다산학 연구는 대체로 비교론적 관점이 중시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연구자의 입지에 따라서 비교론의 방향이 설정되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공유의 사상전통인 유학이 비교고찰의 틀을 제공하며 청대의 고증학파, 에도시대의 고학파의 학설을 다산학과 비교 고찰하는 연구가 제기되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경학이 다산경학과 비교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유학 및 경학이라는 공동의 문화적 기반이 있었기에 이와 같은 비교연구의 주제가 포착된 것임이 물론이다.
반면 구미 지역에서는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비교연구가 제기되었다. 근대적 세계로 이행하면서 일어난 동서의 문명적 만남은 인류사적 의의를 갖는 일이었다. 다산학 자체가 비교문화론적 인식을 가능케 하는 내용이 풍부하다. 이와 같은 양쪽의 비교론적인 연구주제는 한국의 연구자들 또한 관심을 두는 문제이다.
외국에서 활동하는 동포 내지 교포 학자들의 성과도 해외 다산학 연구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재일 교포학자들이 일찍이 실학-다산학을 중시했고, 여기에 근래들어 일본에 유학을 가서 활동하는 연구자들이 가세하였다. 중국 지역에는 조선족자치주인 옌벤(延邊)이 하나의 거점을 이루었다. 이곳의 실학-다산학 연구는 원래 북한학계와 연관이 깊었는데, 한-중수교 이후로는 한국학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구미지역에는 이주와 유학이 증가하면서 다산학 연구가 일어나는 추세이다.

(임형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