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5(정조 9) ~ 1829(순조 29).
정약용의 배 다른 동생.

본관은 나주(羅州), 혹은 압해(押海)라고도 한다. 자는 규황(奎黃)이다. 정약용이 아끼던 서제(庶弟: 아버지와 첩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였다.

정재원(丁載遠, 1730~1792, 호:荷石)과 두 번째 첩이었던 우봉 김씨(牛峰金氏, =岑城金氏, 1754~1813)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봉 김씨는 김의택(金宜澤, 1694~?)의 딸이었다. 정재원은 첫 부인인 의령 남씨와 둘째 부인인 해남 윤씨(海南尹氏, ?~1770)가 모두 사망하고서 황씨(黃氏)를 첩으로 들였으나 또 사망하였다. 그래서 1773년에 20세인 우봉 김씨를 두 번째 첩으로 들였는데 여기서 태어난 아들이 정약황이다. 우봉 김씨는 3녀 1남을 두었는데 큰딸이 채제공(蔡濟恭, 1720~1799, 호:樊巖)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 ?~?)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정약횡(황)과 채홍근은 처남과 매부 사이가 된다.
아버지인 정재원이 늘그막에 본 아들인 탓에 사랑을 많이 받았고 정약용 역시 서모와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어린 아우를 많이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이 서제인 약황을 그리워하는 시를 문집에 남겨놓으면서 그림을 좋아했던 모습을 떠올린 것으로 보면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또한 정약용은 서자 신분의 동생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도를 찾아주려고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이는데 비장(裨將: 지방 장관과 견외 사신(遣外使臣)을 수행하던 관원)이나 의원의 일들을 추천했다. 이런 조언을 들어서인지 정약횡(황)은 후에 의원으로서 살아갔다.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 평창 이씨(平昌李氏), 여흥 민씨(驪興閔氏) 셋이나 되었는데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첫 부인인 한 씨는 한영익(韓永益, 1767~?, 자:時重)의 누이였는데 이런 이유로 정약용은 한영익과 함께 급변을 꾸민 것으로 1799년에 조화진(趙華鎭, ?~?)에게 고발당하는 일도 있었다.

정약황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鳥安面)에 있다.

(허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