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6(영조 32) ~ 1819(순조 19).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휴길(休吉), 호는 척암(瘠蓭)이다. 아버지는 지평 이제현(李齊顯, ?~?)이며 어머니는 정언빈(鄭彦賓, ?~?)의 딸이다. 예조정랑 등을 지냈다. 이승훈(李承薰, 1756~ 1801, 호:蔓川)과 이벽(李蘗, 1754~1786, 호:曠菴) 등에게 천주교에 관한 책을 소개 받았으나 17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목만중(睦萬中, 1727~?, 호:餘窩)ㆍ홍낙안(洪樂安, 1752~?, 호:魯庵) 등과 함께 천주교를 옹호하는 채제공(蔡濟恭, 1720~1799, 호:樊巖)의 관작을 추탈하고 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 錦帶)과 정약용의 처벌을 주장했다. 하지만 오히려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의 분노를 사서 무고죄로 경원(慶源)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순조(純祖, 재위 1800.7~1834.11) 즉위 후에 영ㆍ정조대에 민감한 사안이었던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 영조 38)과 관련 있는 인물인 권유(權裕, 1745~1804, 호:菊圃)와 김달순(金達淳, 1760~1806) 등을 탄핵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벽위편(闢衛編)≫과 편서인 ≪사교징치(邪敎懲治)≫가 있다.

이기경은 1784년(정조 8) 이후로 2~3년간 조정에서 실시하는 제술(製述)과 강경(講經) 시험에 참여했다. 이 시기 동안 정약용, 이가환과 함께 활동하는 모습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에 보이는 서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784년(정조 8) 이후로 정약용ㆍ이승훈 등이 서학을 학습하는 선을 넘어 종교로 수용하는 믿음을 보이자 정조에게 이들을 처벌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 이기경은 1784년(정조 8) 7월에는 시험에서 거수(居首)보다 한 단계 아래의 성적을 받기도 하고, 같은 해 12월에는 제술에서 거수를 받기도 했다. 이 시기 정약용이나 이가환과 함께 활동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785년(정조 9) 12월에는 당시 진사(進士)로서 이기경은 생원(生員) 정약용과 함께 제술 시험을 보았다. 이 시험에서 생원 정약용은 거수를 받았고, 진사 이기경은 그 아래의 성적을 받았다. 1786년(정조 10) 1월에는 책문(策問) 시험이 있었는데, 이 때 동부승지(同副承旨) 이가환이 시관(試官)이 되었고 이기경은 그 감독 아래 책문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1791년(정조 15)에 진산사건이 일어나서 이미 청(淸)에서 세례를 받고 평택현감(平澤縣監)에 재직하던 이승훈과 양근(楊根) 사람 권일신(權日身, 1742(1751)~1791, 호:稷庵) 등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홍낙안은 이들의 행적을 고하면서 자신의 증언을 입증하는 인물로 이기경을 언급했다.
홍낙안은 이기경이 1787년(정조 11)에 성균관(成均館)의 부근 동네인 반촌(泮村)에서 천주교 모임이 있는 것을 보고 와서 자신에게 탄식하며 말했다고 했다. 이에 홍낙안ㆍ이기경 등은 책문에 응하는 글에서 천주교가 전파되고 있는 사정을 진술하게 되었다. 그러자 정조는 이 당시 천주교 서적이 간행되었는지 여부에 관심을 두고서 조사를 진행시켜 나갔다. 정조는 승정원(承政院)에 지시하여 홍낙안에게 서적이 간행된 여부를 더 자세히 물으라 하고, 의금부(義禁府)에는 이승훈을 신문하여 같은 내용을 파악하도록 명했다. 서적이 간행된 형적은 분명히 발견되지 않았고, 홍낙안과 이승훈 등도 간행된 서적에 관해 분명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1791년(정조 15) 11월에 정조는 이승훈을 평택현감에서 삭직하고, 권일신은 사형을 감해서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명했다. 의금부에서는 그 때까지의 조사내용을 종합하여 보고하는 가운데, 이승훈의 공초(供招)도 아뢰었다. 여기서 이승훈은 홍낙안과 이기경 등을 두고 아무 증거도 없고 공연히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억지로 남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고 진술했다.
이에 이기경은 상소를 올려 자신을 조사했던 대신인 채제공 앞에서 충분하게 생각을 전달할 수 없었다고 변명한 후 이승훈이 진술한 공초에서 자신을 무함하고 업신여긴 대목이 있음을 주장했다. 이에 정조는 이기경의 글을 읽고 ‘비록 만 개의 입을 갖고서 청산유수와 같은 변론을 한다 한들, 이는 한갓 교묘하게 하려다 도리어 졸렬해지는 자취만을 보일 뿐’이라고 단정했고 11월 13일에 급기야 이기경을 경원에 유배 보냈다.
1794년(정조 18) 1월에 이기경은 유배형에서 풀려났다. 1795년(정조 19) 4월부터 이기경은 다시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으로 활동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801년(순조 1) 순조가 즉위한 후에 사헌부 장령(掌令)이 된 이기경은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과 정약용 등을 엄히 국문할 것을 청하기도 했다. 1803년(순조 3)에는 정순왕후(貞純王后 金氏, 1745~1805)가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써 경주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벽파(僻派)가 약화되고 점차 김조순(金祖淳, 1765~1832, 호:楓皐)을 중심으로 하는 시파(時派) 세력이 힘을 얻게 되었다. 1804년(순조 4)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국혼을 반대하는 일을 배후에서 사주했다는 이유로 김노충(金魯忠, ?~?)이 제거될 즈음 집의(執義) 이기경은 김노충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에 이기경은 권유와 김달순을 탄핵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1804년(순조 4) 6월에 대간에서 이기경 등은 삼간택(三揀擇)의 문제 등을 거론하며 권유가 ‘우리의 대혼’에 훼방을 놓았다라든가, 이륜(彛倫)을 끊어지게 하여 4백 년 종사가 불안하게 되었다고 하며 권유를 비판했다. 권유는 이 무렵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게 되었다.
이에 정순왕후는 한글문서로 하교하여 권유에게 가해진 탄핵을 반박하면서 자신과 김노충 등의 입장을 변호하려 했다. 권유가 벽파였기 때문에 권유가 탄핵을 받은 일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하교가 내려지고 이틀이 지난 6월 26일에 순조는 ‘10월은 길함이 없다’라는 말을 문제 삼아서 대간에서 김노충을 가리킨 것으로 단정한 후 사실과 다른 죄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연명 상소한 관원을 유배시키라는 하교를 내렸다. 그리하여 이기경은 단천(端川)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뒤 이기경은 1819년(순조 19)에 사망했다.

이기경은 ≪벽위편≫ 등을 저술하고 편서로는 ≪사교징치≫를 남겼다.

이기경은 조선후기 정치사에서 19세기의 정국을 설명할 때에 언급되는 인물이다. 이기경은 서학을 반대하는 선봉장으로서 당색이 같은 친우인 정약용과 이승훈 등을 탄핵하는데 참여했다. 한편 벽파였던 권유와 김달순 등을 탄핵했으면서 그 이후에는 같은 벽파인 심환지(沈煥之, 1730~1802), 김관주(金觀柱, 1743~1806) 등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오히려 탄핵을 받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를 통해 이기경이란 인물은 당시의 정치사를 진단하는 데 흥미로운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