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0(숙종 46) ~ 1799(정조 23).
기호남인 출신으로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 대 후반기의 탕평정국을 주도하였던 정승.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이다. 1720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정약용과는 사돈지간이며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했다. 채제공의 서자인 채홍근(蔡弘謹, ?~?)이 정재원(丁載遠, 1730~1792, 호:荷石)의 서녀와 혼인하였기 때문에 채홍근은 정약용과 처남 매부의 관계가 되고 채제공과 정약용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그래서 채제공이 우의정으로 발탁된 이후 정약용은 한림회권에 들어가면서 정조 대 후반 기호남인의 중요한 정치적 인물 중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때 이조판서ㆍ대제학을 지낸 유후(裕後, 1599~1660)의 방계 5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성윤(成胤, 1659~1733)이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응일(膺一, 1686~?)이다. 어머니는 이만성(李萬成, 1661~?)의 딸이다. 오필운(吳弼運, 1692~?)의 딸을 아내로 맞아 영조(英祖, 재위 1724.8~1776.3) 대 기호남인을 대표하는 정치적 인물인 오광운(吳光運, 1689~1745)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1748년 한림회권(翰林會圈) 때 탕평을 표방한 영조의 특명으로 선발되어 예문관 검열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면서 오광운을 이어 영조 대 기호남인을 대표하는 정치적 인물로서 성장하였다.
≪열성지장(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에 도승지로 임명된 이후에는 영조와 사도세자(思悼世子 = 莊獻世子, 1735~1762)사이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펼쳤지만 사도세자의 죽음을 막지는 못하였다. 영조 말년에는 내직으로 병조ㆍ예조ㆍ호조판서를, 외직으로는 평안감사를 역임하였는데, 1776년 정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사도세자를 보호하였던 그의 행적으로 인해 정조와 지속적인 유대를 맺을 수 있었기에 병조판서로서 연이은 모역사건을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한편, 시노비(寺奴婢) 추쇄(推刷) 혁파의 절목(節目)을 마련하는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상을 잃지 않았다. 기호남인이었지만 영남남인들과도 긴밀한 교류를 하면서 남인들의 정치적 위상 제고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 1748~1781, 자:德老))이 정치적으로 제거되고 서명선(徐命善, 1728~1791)과 정민시(鄭民始, 1745~1800, 호:靜窩)를 중심으로 하는 소론 주도의 정국이 펼쳐지자,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했다가 역적으로 처단된 이덕사(李德師, 1721~?)ㆍ조재한(趙載翰, 1722~?)과의 관련성, 그리고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했다는 죄목 등 이른바 3대 죄안(罪案)으로 집중 공격을 받아 1782년경부터는 정국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그 후 1786년 평안병사를 거쳐서 1788년(정조 12) 우의정으로 다시 전격 발탁되면서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였는데 이는 노론과 소론뿐 아니라 남인까지 아우르는 확대된 탕평을 추구하던 정조의 결심과 노력의 결과였다. 특히 정조는 등극 이후 꾸준히 추진해오던 임오의리(壬午義理: 사대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명분 문제)의 과제를 채제공을 통해서 완수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1789년 임오화변(壬午禍變)에 대한 정조의 인식을 공식적으로 정리한 현륭원(顯隆園)의 지문(誌文)을 작성하고 현륭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채제공은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면서 정조의 뜻에 충실히 부응하였다.
그런데 채제공의 우의정 발탁은 그를 중심으로 한 기호남인들의 정치적 위상을 동시에 강화시켰기 때문에 기존 정치 세력들의 강한 불만을 불러왔고, 특히 1791년의 진산사건(珍山事件)을 기화로 여타 붕당들의 심한 공격을 받았지만 정조의 비호로 인해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1793년(정조 17) 영의정이 되어서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정의 큰 분란을 야기하였다. 하지만 영조의 후회가 담긴 이른바 ‘금등(金縢: 비밀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쇠줄로 봉한 상자, 혹은 그 비밀 문서)의 두 구절(“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오동나무 지팡이여 오동나무 지팡이여!/ 누가 이를 금등으로 영원히 숨길 수 있겠는가?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노라.[血衫血衫, 桐兮桐兮, 誰是金藏千秋? 予懷歸來望思.]”(≪正祖實錄≫17년 8월 8일))’이 공개되면서 정치적인 위기를 또 다시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총리사(摠理使)로서 화성(華城)의 축조를 총괄하다가 1798년 좌의정으로 사직하였고 1799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채팽윤(蔡彭胤, 1669~1731), 오광운, 강박(姜樸, 1690~1742)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운 정통 성리학자로서 학문의 적통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李滉, 1501~1570, 호:退溪)에서 시작하여 정구(鄭逑, 1543~1620, 호:寒岡)와 허목(許穆, 1595~1682, 호:眉叟)을 거쳐 이익(李瀷, 1681~1763, 호:星湖)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때문에 양명학ㆍ불교ㆍ도교ㆍ민간신앙 등을 이단이라고 비판하였지만 이들 사상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측면에서 선용할 수 있다면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천주교(→ 서학)에 대해서는 패륜과 신이적 요소를 지닌 불교의 별파로서 이해하면서 배척의 입장을 보였지만 천주교를 믿는 자와 천주교 자체를 구분해서 처리하려는 교화우선 입장을 견지하였다. 친우로는 정범조(丁範祖, 1723~1801)ㆍ이헌경(李獻慶, 1719~1791)ㆍ신광수(申光洙, 1712~1775)ㆍ안정복(安鼎福, 1712~1791, 호:順庵) 등이 있고, 윤영희(尹永僖, 1761~?, 자:畏心)ㆍ이승훈(李承薰, 1756~1801, 호:蔓川)ㆍ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貞軒)ㆍ정약용 등이 그의 정치적 후계자가 되었다. 문집으로는 ≪번암집(樊巖集)≫ 59권이 있다.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 영남 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그의 묘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 역북동 산3-12번지에 있다.

(허태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