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1(숙종 7) ~ 1763(영조 39).
조선 후기 ‘성호학파’의 연원이 되는 인물로 산림(山林)에 은거하며 경세학을 연구한 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이다. 1681년 10월 17일 아버지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으며 1763년(영조 39)에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병휴(李秉休, 1710~1776, 호:貞山)ㆍ안정복(安鼎福, 1712~1791, 호:順庵)ㆍ윤동규(尹東奎, 1695~1773, 호:邵南)ㆍ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貞軒)ㆍ이중환(李重煥, 1690~1752, 호:淸潭)ㆍ권철신(權哲身, 1736~1801, 호:鹿庵)ㆍ신후담(愼後聃, 1702~1761, 호:河濱)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으며, 정약용도 이익을 사숙하여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정약용은 이익을 영웅호걸과 같은 인재로서 중국 삼대(三代)의 기상을 일으키게 하는 토대를 개척하고 문호를 세워 만세에 꺾일 수 없는 업(業)을 수립한 인물이라고 숭앙하면서 이익의 학문을 계승하는 것이 매우 영광스럽다고 찬탄하였다.
“우리당이 쇠락하여 십 수 년 전의 광경을 다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오직 우리 성호부자(星湖夫子)는 하늘이 낸 영웅호걸의 인재로서 도(道)가 없어지고 교(敎)가 해이된 뒤에 태어나 회재(晦齋, 이언적, 1491~1553)와 퇴계(退溪, 이황, 1501~1570)를 사숙하여 심성(心性)의 학을 경(經)으로 하고, 경제(經濟)의 학을 위(緯)로 하여 수백여 편의 책을 써서 후학을 크게 은혜롭게 하였습니다 … 실로 문왕을 기다려 일어나는 자가 장차 근원이 없는 땅에서 분연히 스스로 일으켰는데, 성호의 문(門)에서 노닐고 성호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이랴.”(시문집 제19권, 문집, <상목재서(上木齋書)>)
한편,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의 스승 권철신은 이익의 문인으로 ≪대학설≫ㆍ≪시칭(詩稱)≫ 등의 저술을 남기면서 경학에도 식견이 높았다. 정약용은 형 정약전과 함께 권철신의 경학해석의 상당한 부분을 수용하였다. 이익의 자득적 학문방법을 적극 추구하였던 권철신이 ≪상서(尙書)≫의 매본(梅本)을 위서(僞書)로 밝힌 부분과 사단(四端)을 행위의 결과물로 해석한 견해는 정약용의 핵심적 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권철신의 학문과 사상을 존숭해왔던 정약용은 권철신의 묘지명에서도 “녹암(鹿菴, 권철신)이 1801년에 죽으니 마침내 학파를 단절케 하여 성호의 문(門)이 그 아름다움을 다시 잇지 못하였다. 이는 세운(世運)이 일가(一家)를 슬프게 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고 이익의 학문이 단절이 된 것을 탄식하는 소회를 밝혔다.
일찍이 정약용은 이가환ㆍ이승훈(李承薰, 1756~1801, 호:蔓川) 등을 통해 이익의 유고(遺稿)를 본 뒤 경세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대표적 저술 일표이서(≪경세유표(經世遺表) ≫,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는 이익의 경세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실제 관료 생활에 있어서도 정약용은 이익의 학문을 계승하고 있었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 호:樊巖)ㆍ이가환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들과 더불어 경륜을 펼쳤다.
1784년에는 성균관에서 이벽(李檗, 1754~1786, 호:曠菴)과 ≪중용(中庸)≫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그 토론의 연장선에서 ≪중용≫ 전체를 천인(天人)의 도(道)로 이해하여 왔던 전래 학설을 비판, 천명에 기초한 인도(人道) 하나로 파악하였다. 성호학파로서 그리고 성호가문의 혼맥으로 인연을 맺고 있었던 이벽을 통해 정약용은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또한, 천주교와 연관되었던 시기를 전후로 하여 정약용이 윤휴(尹鑴, 1617~1680, 호:白湖)의 ‘외천(畏天)-사천(事天)’의 신앙적 천(天)-상제관(上帝觀)을 계승ㆍ발전시킨 것도 이익의 가학연원(家學淵源)과 일정한 연관성이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익의 부친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은 윤휴와 함께 관료생활을 하였으며 많은 점에서 뜻을 같이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경학연구는 이익의 ‘질서(疾書)’ 류 저서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단궁잠오(檀弓箴誤)≫편은 이익의 예학의 취지를 따랐으며, 그리고 ≪주역사전(周易四箋)≫도 이익의 ≪주역질서≫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심경밀험(心經密驗)≫ 역시 이황의 ≪심경후론(心經後論)≫을 계승한 이익의 ≪심경질서≫에서 많은 계발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존숭하고 계승하는 차원에서 이익의 유고(遺稿) 정리에도 노력하였다. 1795년 10월 금정(金井) 찰방(察訪)으로 재직할 때 10일 동안 충청 봉곡사(鳳谷寺)의 서암강학회(西巖講學會)에서 이병휴(李秉休, 1710~1776)의 양자 이삼환(李森煥, 1729~1814)을 필두로 이광교(李廣敎, ?~?)ㆍ이재위(李載威, 1745~1826)ㆍ박효긍(朴孝兢, 1757~?)ㆍ강이인(姜履寅, 1759~?, 자:士賓)ㆍ이유석(李儒錫, 1760~?)ㆍ심로(沈潞, ?~?)ㆍ정약용ㆍ오국진(吳國鎭, ?~?)ㆍ강이중(姜履中, ?~?)ㆍ권기(權夔, ?~?)ㆍ강이오(姜履五, ?~?)ㆍ이명환(李鳴煥, ?~?) 등 13인이 모여 이익의 ≪가례질서≫를 교감하였다.
그는 유배기간 동안에도 형 정약전에게 서간을 통해 “우리 형제들이 성호의 저술을 통해 천지의 넓음과 일월의 밝음을 깨우쳤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1811년에는 채제공이 출간을 하려다가 중단한 이익 문집의 간행을 위해 그 정리를 의논하였고, 이익의 생애 후반기 대부분을 이 저술에 힘을 쏟았던 ≪성호사설≫을 직접 읽으면서 성호의 학문과 사상의 심원함을 이해하였다. 이러한 위대한 저술이 후대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리가 필요함을 알고 그 체재의 미흡함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이익의 증조할아버지 상의(尙毅, 1560~1624)는 의정부좌찬성을, 할아버지 지안(志安, 1601~1657)은 사헌부지평을, 아버지 하진은 사헌부대사헌을 역임한 당대 뛰어난 관료요 학자로 자리매김한 인물들이다. 1680년(숙종 6) 남인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으로 남인이었던 아버지는 대사간에서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다시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이익은 1681년(숙종 7) 10월 17일 아버지의 유배지인 평안도 운산에서 이하진과 어머니 권씨(權氏)사이에 5남 4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이때 아버지는 당대로는 노년기인 54세나 되었다. 이런 늦둥이는 특별한 귀여움을 받았지만 그가 태어난 이듬해에 부친이 사망하자, 어머니 권씨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선영이 있던 경기도 안산(安山) 첨성리(瞻星里)로 이주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병약한 체질 탓에 10세가 넘어서야 둘째 형 이잠(李潛, 1660~1706)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가학을 통한 학문연마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학문에 뜻을 두면서 ≪맹자≫ㆍ≪대학≫ㆍ≪소학≫ㆍ≪논어≫ㆍ≪중용≫ㆍ≪근사록≫ 등을 읽었고, 다시 ≪심경≫ㆍ≪주역≫ㆍ≪서경≫ㆍ≪시경≫ 등을 차례로 독서한 뒤 정자와 주자 및 퇴계의 저술들을 탐독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천문ㆍ역산ㆍ지리ㆍ 천주교 신앙 등에 관한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도 널리 탐독하였다.
1705년(숙종 31) 증광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이름을 적은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아 회시(會試)에는 응시할 수가 없었다. 이듬해 둘째 형 이잠이 희빈 장씨(禧嬪張氏, ?~1701)을 옹호하는 소를 올렸다가 심문을 받고 옥사하자, 이를 계기로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경기 안산의 성호장(星湖莊)에서 재야의 선비로 일생을 살았다. 그가 안산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1678년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중국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에 청제(淸帝)의 궤사은(饋賜銀)으로 사 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 때문이다.
그로 인해 천문(天文)ㆍ역산(曆算)ㆍ지리학과 천주교 교리 등을 담고 있는 한문서학서를 널리 열람할 수 있었고, 만국전도(萬國全圖)ㆍ시원경(視遠鏡)ㆍ서양화(西洋畵) 등 서양문물을 간접 접하면서 세계관ㆍ역사의식을 확대, 심화시켜 나갔다. 그는 정주학 중심의 유학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였고, 종래 중국 중심의 화이관(華夷觀)ㆍ성인관(聖人觀)에서 탈피해 보다 합리적ㆍ실증적 시야를 지니게끔 되었다. ≪직방외기≫ 등을 읽고 지리적으로 중국의 위치가 더 이상 세계 중심이 아니고 땅의 크기도 세계에서 가장 크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더욱이 종래 주관적이고 의리ㆍ시비위주의 포폄적 역사 인식태도에서 벗어나 역사이해를 객관적ㆍ비판적ㆍ실증적 인식태도로 접근해야 한다고 믿었다.
1727년(영조 3) 47세 되던 해 그의 명성이 알려져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사양하고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이맹휴(李孟休, 1713~1750, 자:醇叟)는 문과에 장원급제해 정랑(正郞)에 올랐지만 일찍 죽는 등 지병과 가난으로 고통을 받았다. 1763년 노인을 우대하는 제도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83세의 일생을 마치고 안산 첨성리 선영에 안장되었다.
한국사에서 실학을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에 걸쳐서 주자학(朱子學)에 대한 반성과 서학의 영향으로 형성 전개되었던 새로운 학문적ㆍ사상적ㆍ사회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듯하다. 실학개념을 이렇게 수용할 경우 성호 이익은 주 활동 시기가 18세기라는 점, 학문적ㆍ사상적인 측면에서 당대 인물 비중으로도 가장 중심에 서 있으면서 그 폭과 깊이의 범주도 누구와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특출하므로 그를 실학자로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그의 시대적 인물 비중을 감안하여 그를 흔히 ‘실학의 호수’라고도 하지만 근대 이후 역사적 영향력으로 비춰볼 때 ‘실학의 한 줄기’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런데, 실학을 경세학파ㆍ이용후생학파ㆍ실사구시학파라는 3대학파로 나누어 해석하였던 지난 학설로써 논한다고 해도 이익은 경세치용학파의 대표자로 꼽힌다. 그만큼 그의 시대적인 위치는 우뚝하다. 비록 살아생전 그의 위대한 업적에 걸 맞는 명성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사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겨 놓은 학문과 사상에 대한 평가는 ‘그의 당대 일반적인 지식인의 학문과 사상을 뛰어넘는 위대한 실학자’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이익의 묘소가 안장된 곳은 경기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번지이다(2011년 2월 현재). 수인선 산업도로가 바라보이는 성호기념관 길 건너 구릉이다. 이익과 두 부인 고령 신씨와 사천 목씨가 합장되어 있다. 성호가 묻힌 주변은 이익 가문의 선산이었으나 안산시 신도시 개발로 이익의 묘소만 남겨두고 모두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 이익 묘소는 우측으로 재실(齋室) 경호재(景湖齋)가 있고, 사당으로 첨성사(瞻星祠)가 있다. 한편, 석물(石物)로는 묘비ㆍ향로석(香爐石)ㆍ상석(床石)ㆍ망주석(望柱石) 등이 있다. 묘비는 후손에 의해 1967년이 되어서야 건립되었고, 묘갈명은 채제공이 지었다.
그의 주 활동무대였던 안산시가 그를 기리기 위해 ‘성호기념관’을 2002년 5월에 준공, 개관하였다. 성호기념관은 ‘안산이 낳은 위대한 실학자 성호 이익 선생의 생애를 기리고 그 학문적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안산시가 건립한 기념관’이라고 그 취지를 밝히고 있다. 이곳에는 이익의 친필 시고(詩稿) 및 간찰(簡札), ≪성호사설≫ㆍ≪성호선생문집≫ 등의 저서와 이황ㆍ유형원(柳馨遠, 1622~1673, 호:磻溪)ㆍ허목(許穆, 1595~1682, 호:眉叟)ㆍ정약용 등의 저작물 등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들은 복제가 아닌 실제 유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특히 개인이나 종중에서 소장하던 상당수 미공개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성호기념관이 위치한 곳은 경기 안산시 상록구 성호길 163(이동 615번지, 2010년 7월 현재)이다.
(강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