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 黃裳
1788(정조 12) ~ 1863(철종 14) 무렵.
시인. 정약용이 강진(康津) 유배시절에 지도한 읍내 제자 중의 한 사람.
자는 산석(山石) 또는 자중(子仲), 제불(帝黻)이며, 호는 치원(巵園)이다. 본관은 창원으로, ≪창원황씨세보(昌原黃氏世譜)≫에는 8대조 황세중(黃世中)이 호남으로 낙향하여 강진에 자리를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황인담(黃仁聃)과 양천허씨(陽川許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대대로 강진의 성읍에 살면서 군량미나 마초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는 정학연(丁學淵, 1783~1859)의 기록에 따르면 향리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노년에는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秋史, 阮堂)와 교유하며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으로 내려와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칭하는 주막에서 기거하면서 저술에 주력하는 한편 읍내 아전(衙前) 집의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 때 황상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황상은
이청(李𤲟 = 李鶴來, 1792~1861, 호:靑田) 등과 정약용 문하에서 수학하며 정학연ㆍ정학유(丁學游, 1786~1855, 호:耘逋) 형제와 사귀기도 하였는데 ≪주역≫과 ≪예기≫ 등의 정수를 터득하고,
이용후생(利用厚生)과 명물도수(名物度數)의 학문에도 밝았다고 전한다. 그러나 1808년 정약용이 읍내에서 다산초당으로 옮겨 해남윤씨의 양반 자제를 가르치게 되자, 황상은 가정 형편을 이유로
정약용의 문하에서 점차 멀어져 정약용을 매우 안타깝게 하였다.
1818년 정약용이 해배되어 강진을 떠나자 황상은 가솔을 이끌고 천개산(天蓋山) 백적동(白磧洞)으로 들어가 세속과 단절한 삶을 살았다. 일찍이 황상이 ≪주역≫의 “유인정길(幽人貞吉: 숨어있는 자라야 바르고 길하리라).”에
대하여 묻자 정약용이 <제황상유인첩(題黃裳幽人帖)>을 써주며 은사(隱士)의 삶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려준 적이 있었는데,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후 정약용과 소식을 끊고 지내던 황상은 1836년 정약용 내외의
회혼례(回婚禮)에 참석하기 위하여 18년만에 상경하였다가 병석에 누운 정약용을 마지막으로 만나고 장례를 치르고 돌아간 뒤, 10년 뒤 정약용의 기일에 다시 상경하여 스승에 대한 변함없는 의리를 지켜 주위를 감복케 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가(兩家)의 우의를 약조하는 ‘정황계(丁黃契)’를 맺고, 서신을 주고받으며 황상이 몇 차례 상경하여 돈독한 관계를 다져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김정희의 형제와도 교유하며 시인으로서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유작으로 ≪치원유고(巵園遺稿)≫가 전하는데 이는 1977년 강진 만덕사(萬德寺: 지금의 백련사, 전남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145(만덕리) 소재) 근처에 있는 황상의 후손가에서 이우성(李佑成)이 발견하였다.
≪치원유고≫는 ≪다산학단 문헌집성(茶山學團 文獻集成)≫(2008)에 포함되어 간행되었다. 정학연 형제와 김정희 형제 등 교유 인물들이 황상에게 써준 글을 모은 <송치원시첩(送卮園詩帖)>과 <치원진완(卮園珍玩)> 및
정약용이 황상에게 준 글과 편지를 모아 만든 첩이 전한다.
정약용 사후에 황상은 상경하여 다산가인 여유당(與猶堂)과 추사가인 과지초당(瓜地草堂)을 오고가며 양가의 인물들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김정희는 ‘요즘 세상에 이런 작품은 없다[今世無此作]’라는 특별한
찬사를 보냈으며, 김명희(金命喜, 1788~1859)는 시대현실과 자신의 처지에 충실한 개성적 시인으로 평가하였다. 황상은 정약용의 가르침을 따라 두보(杜甫, 712~770, 호:少陵野老), 한유(韓愈, 768~824),
소식(蘇軾, 1037~1101), 육유(陸游, 1125~1210)의 시만을 50년간 익혔을 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시를 계승하여 <애절양(哀絶陽)>, <승발송행(僧拔松行)> 등과 같이 정약용의 작품들과 동일한 제목을 지닌
작품들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정약용 시학의 계승자 황상이 김정희의 문하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19세기 문학사에서 주목할 사실로서 황상의 위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