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장 惠藏

1772(영조 48) ~ 1811(순조 11).
조선 후기 백련사(白蓮社(寺) = 만덕사(萬德寺))의 주지였고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大興寺: 옛 대둔사(大屯寺))의 열 두 대강사(大講師) 중
하나로 추숭된 학승(學僧).

혜장은 법명(法名)이다. 법호(法號)는 아암(兒庵), 연파(蓮坡)였다. 속성은 김씨이고 어릴 때의 이름은 팔득(八得), 자는 무진(無盡)이었다. 1772년 색금현(塞金縣: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방(花山坊))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대둔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30세에 대둔사 강회(講會)의 종장(宗匠)이 되었다. 1805년 정약용을 만나 ≪주역(周易)≫과 시를 배우고 깊이 교유하며 정약용의 불교 교리와 역사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1811년 40세로 백련사에서 입적하였으며, 정약용은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을 지어 그 넋을 위로하고 탑명(塔銘)을 지어 천재였던 그의 요절을 슬퍼하고 기렸다.

혜장은 1805년 가을 그가 주지로 있던 백련사에서 정약용을 처음 만났다. 당시 천주교(→서학) 신앙 문제로 강진에 유배되었던 정약용이 백련사를 방문하여 만나게 된 것이다. 정약용은 혜장이 승려로서 진솔하고 올곧은 사람임을 알아보고 밤이 늦도록 ≪주역≫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박식함에 놀랐다. 이후 혜장은 정약용의 거처인 보은산방(寶恩山房)을 오가며 주역을 배웠고, 1809년 정약용이 백련사의 이웃인 다산에 초당을 짓고 거처하게 되면서 둘 사이의 학문적 교류와 정의가 더욱 빈번해지고 깊어졌다.
한편, 혜장은 시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정약용의 권유로 <장춘동(長春洞)> 20운, <산거잡흥(山居雜興)> 12수, <보살만(菩薩滿)> 등을 지었고, 이에 정약용도 차운하거나 같은 제목으로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정약용은 이 밖에도 13편이 넘는 시를 지어 혜장에게 주었다. 이는 정약용이 한 사람에게 준 시로 제일 많은 것이었다.
19세기 초의 어느 해 연행사(燕行使) 편으로 중국에 들어간 혜장의 시 <장춘동> 이 청(淸)나라의 금석학자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자:正三, 호:覃溪)에게 전해져 찬사를 받았다. 옹방강은 자신의 시문집 6권과 초상화 1점, 그리고 ≪금강경(金剛經)≫을 손수 써서 당시 연행사였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秋史, 阮堂) 편에 보냈다고 한다.
정약용은 한국고대불교사인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와 ≪만덕사지(萬德寺志)≫를 편찬하였는데 혜장과 그의 제자들의 협력으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1811년 혜장이 입적하였을 때 정약용은 만사를 쓰고 제문을 지어 그의 요절을 슬퍼했고, 혜장 문도들의 청으로 <아암장공탑명(兒菴藏公塔銘)>을 지었다.

정약용에 따르면 혜장은 출신이 미천하고 집도 가난했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 승려가 된 뒤 불과 나이 서른에 대흥사 강회의 종장이 되었다. 혜장은 대흥사에서 중이 되어 재관(再觀, ?~?, 호:月松)을 은사로 계를 받았으며, 이어 천묵(天黙, ?~?, 호:春溪)에게 배웠는데 천묵은 불교는 물론 유교 서적까지 통달한 고승이었다. 이어 유일(有一, 1720~1799, 호:蓮潭), 정일(鼎馹, 1678~1738, 호:雲潭) 등에게 배우고, 27세에 즉원(卽圓, 1738~1794, 호:晶岩)의 법을 이었다. 즉원의 법맥은 휴정(休靜, 西山大師, 1520~1604, 호: 淸虛)의 적통인 태능(太能, 1562~1649, 호:逍遙)의 법이며 이를 이어받은 문신(文信, 1629~1707, 호:華嶽)의 법을 이었다. 한편 혜장은 여러 강백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경전을 배웠으나 쉽게 수긍하지 못하였고, 오직 유일이 쓴 글과 가르침에 대해서만 비웃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나이 서른에 대흥사 화엄 강회의 종장이 되었는데 이 때 모여든 이가 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혜장은 조선 후기 서산대사 휴정의 선법이 이어지고 있던 대흥사로 출가하여 그 선맥을 이었다. 한편, 그는 대승경전을 깊이 공부한 교학승이었다. 연담대사 유일에게서 화엄종의 종지를 얻었고 그것을 일곱 번씩 가르쳤으며, ≪능엄경(楞嚴經)≫과 ≪기신론(起信論)≫을 신봉하고 주문(呪文)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총림행(叢林行)>에서도 당시 선승들이 삼장(三藏)을 물리치고 당(唐)나라의 종심(從諗, 778~897, 호:趙州)의 구자 화두(狗子話頭=狗子無佛性話: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는 물음에 대한 종심(조주대사)의 긍정과 부정)를 들고서 졸며 평생을 허비하는 것을 꾸짖고 달마(達磨, ?~528 ?)의 선법(禪法)인 면벽(面壁) 수행 못지않게 종밀(宗密, 780~841, 호:圭峯)의 ≪화엄경(華嚴經)≫ 주석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였다.
한편 혜장은 불교 외에도 유학을 배우고자 당대 유가의 종장(宗匠)이나 산림처사를 만나 법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1805년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용을 만나 입적하기까지 5년여에 걸쳐 유학을 배우고 시를 배웠다.
혜장은 저서를 즐기지 않은데다 40세에 요절한 터라 남은 저서가 많지 않다. 다만, 그의 문도들이 흩어져 있던 글을 모은 ≪아암유집(兒菴遺集)≫ 3권이 전한다. 이 밖에 ≪대둔사지(大芚寺志)≫ 편찬과 ≪만덕사지≫ 편찬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모두 그가 입적한 뒤 완성되었다.
그의 문도로는 색성(賾性, 1777~?, 호:袖龍), 자홍(慈弘, ?~?, 호:騎魚), 응언(應彦, ?~?, 호:掣掠 ), 법훈(法訓, ?~?, 호:枕蛟), 요운(擾雲, ?~?, 호:逸虯)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문집을 남길 정도로 문장력을 지녔던 학승들이었다.

혜장은 ≪화엄사기(華嚴私記)≫로 저명했던 유일의 선ㆍ교(禪ㆍ敎) 합일적 학풍을 이은 학승이었고 30세에 조선 후기 대흥사에서 행해지던 화엄종회를 주관한 종장이었다. 그는 선교합일의 학풍만이 아니라, 유학자들과 교류를 위해 유불을 겸학(兼學)했던 학풍으로도 19세기 초 이후 대흥사와 백련사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학승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혜장의 탑비명은 그가 입적한 이듬해인 1812년 그 제자들의 청으로 정약용이 지었다. 그의 비명은 1845년 <동방 제15조 연파대사비(東方第十五祖蓮坡大師碑)>란 이름으로 대흥사에 세워졌다. 한편 혜장의 유저인 ≪아암유집≫은 그가 입멸한지 백여 년이 지난 1919년에 처음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