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 李𤲟

1792(정조 16) ~ 1861(철종 12).
정약용의 제자로서 다산학단의 문헌고증과 협동작업의 학문 방법론을 전개한 실학사상가.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아명은 학래(鶴來), 자는 금초(琴招), 호는 청전(靑田)이다.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 강진 읍내 제자 6인 중 한명으로 정약용의 저술활동을 지척에서 보좌한 평생의 제자였다. 정약용의 ≪대동수경(大東水經)≫과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의 ≪현산어보(玆山魚譜)≫를 거의 전적으로 편집ㆍ고증했으며, 다산학단에서는 유일하게 천문역산 분야의 저서 ≪정관편(井觀編)≫을 단독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청은 정약용이 강진 읍내의 학동들을 모아놓고 가르치던 1805년에 14세의 나이로 처음 제자가 되었다. 그는 정약용이 이듬해 가을부터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자신의 집에서 스승을 모시기도 했다. 이후 정약용의 다산초당 시절 저술활동을 지척에서 보좌했으며, 정약용이 해배되어 서울로 돌아온 후에도 함께 올라와 스승의 저술활동을 보좌했다.

이청은 강진 읍내의 한미한 이서(吏胥)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의 유배지에서의 강학활동은 시골 청년 이청으로 하여금 지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천우(天佑)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1805년 14세의 나이로 정약용의 수제자가 된 이청은 문헌 고증과 편집 및 정리 작업에 있어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강진시절 몸이 불편한 스승을 도와 수많은 저술활동이 가능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표적으로 ≪시경강의보(詩經講義輔)≫, ≪대동수경≫, ≪악서고존(樂書孤存)≫, ≪만덕사지(萬德寺志)≫, 그리고 해배된 이후의 ≪사대고례(事大考例)≫ 등은 공동 집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청이 편집과 정리, 고증 작업을 했던 문헌들이다. 그는 정약용이 해배되어 상경한 이후에도 스승을 따라 올라와 저술활동을 보좌했다.
뿐만 아니라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秋史, 阮堂)의 문인들인 화가 허련(許鍊, 1809~1892, 호:小痴), 역관(譯官) 출신의 출세한 문인 이상적(李尙迪, 1804~1865)과 교유했다. 또한 가학(家學)으로 천문역산과 농학 등의 전문적 지식에 해박했던 서유구(徐有榘, 1764~1845, 호:楓石)의 서자(庶子)인 서팔보(徐八輔, 1835~?)와도 매우 친하게 지냈다. 이청의 말년인 1860년 무렵에 유작으로 남긴 천문역산서 ≪정관편≫의 집필은 그러한 서울 생활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외에도 ≪정관편≫이 ≪동이자(東夷子)≫라는 제명이 붙은 전집의 17권부터 24권에 포함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독자적 저술이 더 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전하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정약용이 강진시절 저술한 대부분의 중요 문헌이 그의 손을 거쳐 문헌 고증 및 편집ㆍ정리되었다는 사실에서 이청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겠다. 또한 8권 3책에 달하는 ≪정관편≫의 저술은 다산학단의 유일한 천문역산 분야의 저술이라는 점에서, 그는 다산학단을 대표하는 과학기술자라 불러도 타당할 것이다. 그의 ≪정관편≫은 1850~60년대 다산학단의 학인들은 물론, 조선의 유학자들이 어떠한 천문학 지식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저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