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회 李綱會
1789(정조 13) ~ ?.
정약용의 제자로서 다산학을 계승하여 다양한 실학 논의를 전개한 조선 후기 실학사상가.
이강회는 광주 이씨(廣州李氏)로서 자는 성통(聖統)(혹은 紘父, 紘甫)이다. 별호는 격경자(擊磬子), 유암(柳菴)이다. 정약용의 강진 유배 시절, 다산초당에서 공부하였으며 정약용이
≪춘추고징(春秋考徵)≫,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상의절요(喪儀節要)≫를 수정ㆍ완성하는 데 조력하였다. ≪주례(周禮)≫연구에 집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강회는 정약용이 1808년 강진 읍에서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만난 제자였다. 그는 북인계로서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사위였던 이보만(李保晩, ?~?, 호:淸潭)의 5대손이며 정약용의
어머니 집안인 해남윤씨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어렵지 않게 정약용의 제자가 될 수 있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는 정약용 문하에서 다산학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여유당전서≫에는 그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정약용이 1813년경 그의 형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강회가 경학과 예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전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또한 이강회는 정약용이 ≪춘추고징(春秋考徵)≫의 수정본과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상의절요(喪儀節要)≫를 완성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정약용이 해배된 직후에는 우이도에 기거하면서 ≪주례(周禮)≫ 및 실학사상 연구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이강회는 강진에서 이기준(李基俊, ?~?)의 4남 4녀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는 과거 공부에 열중하다가 장년에 이르러서 경학을 연마하였다. 그 즈음에 정약용을 만나 다산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1808년 정약용을 만난 이래로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정약용이 해배된 직후인 1818년 가을 우이도로 건너갔다. 그는 정약전이 머물렀던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의 집에
기거하면서 ≪주례≫를 연구하였고 실학과 관련한 다양한 저술들을 남겼다. 그는 1818년 겨울에 ≪운곡선설(雲谷船說)≫을 완성하였다. ≪운곡선설≫은 문순득의 표류담을 기록한 ≪표해시말(漂海始末)≫의
부록격인 저서로서 서양 선박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다. 이강회는 ≪주례≫의 ‘동관(冬官)' 편에 관심이 많았는데 선박에 대한 관심도 이것의 연장이었다. 이러한 선박에 대한 관심은 1819년 2월 하순경
표류한 중국인들과 만난 것을 기록한 ≪현주만록(玄洲漫錄)≫에서도 보인다. 한편, 그는 우이도에서 제주도로부터 유배온 김익강(金益剛, ?~?)이라는 인물을 만났다. 김익강은 1813년에 일어난
제주도 ‘양제해(梁濟海, 1770~1813) 모변사건’의 주인공인 양제해의 장인이었다. 그는 김익강을 통하여 이 옥사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에 기록하였다.
이 자료는 19세기 제주도 양제해 옥사와 상찬계(相贊契)라는 향촌조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1819년 말까지 우이도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상세하지 않다.
단, 1830년 정약용이 69세 되던 해 이강회에게 그간의 공로를 위로하는 시를 주었다는 것과 1836년 정약용이 생을 마치는 날 이강회가 서울에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현재
그의 몰년은 확인할 수 없다. 족보에는 아들로서 이병사(李秉泗, ?~?), 이병대(李秉大, ?~?)가 있었다고 하나 이들의 생몰년 또한 규명하기 어렵고, 이병귀(李秉貴, ?~?)가 양자로서 대를 이은 것으로 되어있다.
저서로는 ≪유암총서(柳菴叢書)≫, ≪운곡잡저(雲谷雜櫡)≫, ≪탐라직방설(耽羅職方說)≫, ≪현주만록(玄洲漫錄)≫, ≪물기당요찬(勿欺堂要纂)≫이 전하며, ≪주관연의(周官演義)≫, ≪운곡만필(雲谷漫筆)≫,
≪운곡정요(雲谷政要)≫, ≪운곡일초(雲谷日鈔)≫의 저서들은 현재 책의 이름만 전하고 있다.
이강회는 다산학을 계승하는 것과 함께 기호남인 실학사상의 전통과 북학파의 사유도 접목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사상체계를 만들었다. 그러한 점에서 이강회의 실학사상이 갖는 의의는 크다고 하겠다.
그의 실학사상 속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주례≫ 연구였다. 그는 ≪주례≫ 연구의 과정에서 수레와 선박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호:燕巖) 등의 북학사상과도 연결되었다.
또한 그는 ≪주례≫ 연구를 통하여 군주권의 강화와 법ㆍ기강을 중시하는 사유를 발전시켰다. 그의 실학사상은 기호남인과 북학파의 실학사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하였다는 데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강회의 묘는 현재 전라남도 강진군 신전면 용월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