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순 意恂

1786(정조 10) ~ 1866(고종 3).
조선 후기 선론(禪論)을 전개하고 차로 일가를 이룬 대흥사(大興寺)의 선승.

속성은 장(張)씨로 본관은 흥성(興城)이며 자는 중부(仲孚)이다. 1786년 전라도 나주군(지금의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면(三鄕面)에서 태어나 16세에 출가하였다. 법명은 의순(意恂)이고 초의(草衣)는 법호이다. 대둔산 중턱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오래 살아 ‘일지암’으로도 불리었다. 대흥사의 13 대종사(大宗師)로 일컬어지는 의순은 선학(禪學)에 깊었고 다도(茶道)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그림과 글씨에 능한 예능인으로, 시승(詩僧)으로 사대부들과 교유하며 이름을 떨쳤다. 일지암에서 40여 년간 지관(止觀)을 닦다가 1866년 입적하였다.

≪초의집(草衣集)≫에 따르면 의순이 정약용을 처음 만난 것은 1809년 무렵이다. 이때부터 의순은 정약용에게 유학을 공부하는 한편 시를 배웠는데 이것은 이후 사대부들과의 교유에 큰 바탕이 되었다. 의순은 1812년 정약용과 함께 백운동 계곡을 여행하면서 <백운동도(白雲洞圖)>를 그리고 정약용과 더불어 시를 지어 붙였다. 이어 같은 해 <다산초당도(茶山草堂圖)>를 그렸다. 정약용은 한 때 의순의 안내로 대흥사를 방문하고 <만일암지(晩日菴志)>를 썼다. 그리고 대흥사의 사지인 ≪대둔사지(大芚寺志)≫ 편찬에 협력한 적이 있는데 이 또한 의순과 혜장(惠藏, 1772~1811, 호:兒菴)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약용은 다산에 거처하면서 ‘다산(茶山)’이란 아호를 쓸 만큼 차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혜장(惠藏)과 다도(茶道)의 전문가였던 의순의 영향이 컸다. 한편 의순은 정약용의 두 아들인 학연(丁學淵, 1783~1859)·학유(丁學淵, 1786~1855, 호:耘逋)와도 교유하여 서로 주고받은 시문을 적지 않게 남겼다.

의순은 16세 때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의 민성(珉聖, ?~? 호: 碧峯)에 의해 승려가 되었다. 이후 19세 때 해남 대흥사의 윤우(倫佑, 1720~1799, 호:玩虎, 玩湖)에게 나아가 법을 전수 받고 ‘초의(草衣)’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금담(金潭, ?~?)선사에게서 선법(禪法)을 전수받았다.
의순이 살았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은 대흥사가 휴정(休靜, 1520~1604, 호:西山, 淸虛)을 모시는 표충사(表忠祠)의 사액을 받고 종원(宗院) 사찰임을 내세워 그 격을 높이던 때로 불사가 많았다. 이러한 때 그는 불전을 익히고 지관(止觀) 수행에 힘쓰는 한편 중건 불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시문 능력이 뛰어나 대흥사의 크고 작은 불사와 관련된 모연문, 권선문, 상량문, 조성기 등을 지었다. 1817년 천불전을 조성할 때 <천불전상량문(千佛殿上梁文)>과 <중조천불기(重造千佛記)>를 지었고, 이밖에 <대둔사비로전상량문(大芚寺毘盧殿上梁文)>(1841), <표충사중건상량문(表忠祠重建上梁文)> 등 수많은 불사 관련 양식의 글을 지었다. 이 가운데 자신과 색성(賾性, 1777~?, 호:袖龍)이 편집을 맡고 시오(始悟, 1778~1868, 법호:縞衣)와 자홍(慈弘, ?~?, 호:騎魚)가 교정을 맡아 감정을 맡은 스승 윤우, 혜장 등과 함께 정약용의 협력을 받아 대흥사의 사지인 ≪대둔사지≫(1823)를 편찬한 것은 기념비적이다. 한편 의순은 글씨와 그림, 단청 등에도 뛰어나 대흥사에 자취를 남겼던 조사들의 영정(影幀)과 탱화를 그리고 단청을 하는 등 손수 불사를 수행했다.
의순의 불교 외적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정약용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강진에 유배되어 있던 정약용을 찾아 주역과 유학을 공부하고 시를 배웠다. 이로써 그는 유불 겸전의 지식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교양을 쌓았고 이후 많은 사대부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의순은 1815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가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유·정학연 형제와 만나 시를 수창하였고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秋史, 阮堂)·김명희(金明喜, 1788~?)·김상희(金相喜, ?~?) 형제, 권돈인(權敦仁, 1783~1859), 홍현주(洪顯周, 1793~1865), 신위(申緯, 1769~1845)와도 사귀었다. 이후 1830년과 1838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 올라가 이들과 시를 수창하면서 교유하는 한편 이들의 글이나 글씨를 받아 대흥사 중흥에 힘을 보탰다.
의순은 여러 방면에 재능을 보였는데, 시문집인 ≪초의시고(草衣詩稿)≫와 ≪일지암문집(一枝庵文集)≫ 외에도 ≪동다송(東茶頌)≫, ≪다신전(茶神傳)≫등을 지어 다도로 일가를 이루었다.
의순의 본색은 선승(禪僧)이었다. 그는 선학에 깊이 통달하여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선문염송선요소(禪門拈頌選要疏)≫ 등을 저술했다. 특히 ≪선문사변만어≫는 긍선(亘璇, 1767~1852, 호:白坡)이 ≪선문수경(禪文手經)≫에서 주장한 삼종선(三種禪)설에 대한 비판으로 이후 선논쟁을 촉발시켜 성리학적 지배질서에 눌려 침잠해 있던 조선 후기 불교계를 진작시켰다. 한편 임진왜란 전후 전라도 지역에서 중생구제에 활약이 컸던 진묵(震默, 1562~1633, 호:一玉)대사 이야기를 모아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를 찬술하였다.
의순은 승려로서 승가에서 필요한 거의 모든 일을 해냈다. 그는 이처럼 수많은 불사를 수행하는 한편 두륜산(頭輪山)의 일지암(一枝庵)에서 40년 동안 지관(止觀)을 닦다가 1866년 81세로 입적하였다.

18세기 후반 대흥사는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로부터 휴정을 모시는 표충사 사액을 받고 12 종사(宗師)와 12 강사(講師)를 추숭(追崇)하여 종원 사찰임을 표방한 중흥의 기치를 내걸었다. 따라서 당시 많은 중건 불사가 있었는데 의순은 다양한 재능으로 여러 불사를 적극 수행했다. 한편 그는 선승으로서 ≪선문사변만어≫를 지어 긍선의 삼종설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는 약 백년에 걸친 선논쟁을 촉발시켜 성리학적 지배질서에 억눌려 있던 조선 후기의 불교계를 진작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편 의순은 정약용을 만나 유학과 실학에 눈을 뜨고 사대부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하여 김정희 형제, 권돈인, 홍현주, 신위 등 서울의 사대부들을 만나 서예와 그림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그들에게는 불교를 강론하고 다도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따라서 의순의 사대부들과 교유는 19세기 전중반의 유불(儒佛) 간 교유의 한 성향을 찾아볼 수 있는 점에 의의가 있다.

의순은 1840년 헌종(憲宗, 재위 1834~1849)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의순의 부도는 대흥사 비전에 있는데 탑명은 이희풍(李喜豊, 1813~1886)이 지었다. 이후 1941년 전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 박한영(朴漢永, 1870~1948)이 신헌(申櫶, 1810~1884)이 지은 탑비명(강위(姜瑋, 1820~1884)가 대신 지은 것임)을 새겨 부도 옆에 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