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낙안 洪樂安
1752(영조 28) ~ ?.
조선후기의 문신. 남인계 인물.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인백(仁伯), 호는 노암(魯庵), 희운(羲運)이다. 아버지는 홍복호(洪復浩, ?~?)이며 어머니는 박상진(朴象眞, ?~?)의 딸이다. 경상북도 안동 출신이며, 남인이다. 원래
이승훈(李承薰, 1756~ 1801, 호:蔓川), 정약용 등과 안면이 있었으나, 17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이기경(李基慶, 1756~1819, 瘠蓭)ㆍ목만중(睦萬中, 1727~?, 호:餘窩) 등과 함께
이승훈과 정약용 등을 탄핵했다. 더 나아가 채제공(蔡濟恭, 1720~1799, 호:樊巖)의 관작을 추탈하고 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 錦帶)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는 홍낙안을 가주서(假注書) 자리에서 해임시켰다.
정약용은 홍낙안에 대해 주로 진산사건 이후에 갖게 된 홍낙안에 관한 인상을 바탕으로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 그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정약용은 지인의 묘지명을 몇 편 서술하면서
홍낙안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현했다. 이가환의 묘지명에서 정약용은 1801년(순조 1)에 ‘악인 목만중ㆍ홍낙안ㆍ이기경 등이 서로 모의하여 채제공과 이가환과 정약용 자신을 해치려고 하였다고
서술했다. 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는 ’악인 홍낙안‘ 등이 공모하여 선류(善類)를 다 제거하려고 했다고 서술하여 홍낙안이 자신을 포함한 채제공, 이가환 등을 공격하여 죽이려 했다는 시각을 보였다.
그 외에도 정약용은 목만중ㆍ홍낙안ㆍ이기경 등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가환의 무죄를 밝히려다가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 오석충(吳錫忠, ?~?)이라든가, 신유옥사(辛酉獄事)의 관계자를
심문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 포도대장(捕盜大將) 이광익(李光益, ?~1811), 포도대장이었던 임율(任嵂, ?~?) 등이 그러했다고 한다.
홍낙안은 영남 출신의 남인이었지만 서학(西學)을 배척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 당시 서학 관련서적에 관심을 두고 학습하던 학인층은 주로 이익(李瀷, 1681~1763, 호:星湖)의 제자들인 기호남인(畿湖南人)이었다.
이익의 제자들 중에서도 서학을 수용하는 여부를 놓고 신후담(愼後聃, 1702~1761, 호:河濱), 안정복(安鼎福, 1712~1791, 호: 順菴) 등은 서학에 비판적이었다. 반면 권철신(權哲身, 1736~1801, 호:鹿庵),
이가환, 이벽(李蘗, 1754~1875, 호:曠庵), 정약용 등은 서학에 관심을 갖고 신앙으로 수용하는 이들도 생겨날 정도였다.
이들의 신앙활동은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 지방에 있는 친지들에게도 퍼져 나갔고 그 지역의 중인(中人) 계층과 부녀자, 평민 계층에게도 천주교의 교리가 퍼져 나갔다. 이를 우려한 안정복과 신후담 등은
천주교 교리를 반박하는 ≪서학변(西學辨)≫ㆍ≪천학고(天學考)≫ㆍ≪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기도 했다.
홍낙안 역시 신후담, 안정복과 같은 시각에서 그 입장을 드러냈다. 홍낙안은 당시의 서학 전파 상황을 우려하면서 1785년(정조 9)과 1787년(정조 11) 여름에 책(策)을 논하는 글에서 충청ㆍ전라 지역에서 ‘거의 집집마다
성경을 외고 전하며 한문으로 된 글을 언문으로 베껴 써서’ 천주교가 퍼져나간다고 진술했다. 또 1788년(정조 12)에 춘당대도기시(春塘臺到記試)라는 책시(策試)에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 또는 사설(邪說)로 부르면서
배척했다. 이 외에도 홍낙안은 당시 좌의정(左議政)이었던 채제공에게 서신을 보내 권철신을 비난하기도 했다.
홍낙안은 진산사건 당시에도 진산군수(珍山郡守) 신사원(申史源, ?~?)에게 서신을 보내어 윤지충(尹持忠, 1759~1791, 자:禹用)을 늦게 체포한 것을 질책했고 사대부와 일반 선비들에게도 서신을 돌려 양근(楊根) 사람
권일신(權日身, 1742(1751)~1791, 호:稷庵)을 교주(敎主)로 지목하기도 했다.
반면 정조는 사학을 배척하는 교서를 통해 사학의 폐단을 바로 잡는 방법은 정학(正學)을 밝히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을 밝혀 서학을 탄압하기보다는 정학(=성리학)을 밝히고 굳건히 하자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던 중에 홍낙안이 계속 상소하여 이승훈 등에게 벌을 줄 것을 청하자 정조는 천주교 서적 발간에 대한 진상 규명에 나선 후 이승훈을 평택현감에서 삭직하고, 권일신을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명하여 진산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홍낙안이 진술한 서적 발간이 끝내 분명히 밝혀지지 않자 홍낙안의 상소를 문제 삼았다. 정조는 홍낙안 등이 장서(長書)를 올리고, 통문으로 돌리고, 상소를 한 이면에는 반드시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 여겨
승지 홍인호(洪仁浩, 1753~1799)를 문책한 후 홍낙안의 의도가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키려는 것[辟邪衛正]보다는 좌의정 채제공을 공격하는 데에 원래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정조는 1792년(정조 16) 2월 23일에
정창순(鄭昌順, 1727~?, 호:四於)을 예조판서로 임명하고 면대하는 자리에서 좌의정 채제공을 보호하겠다는 입장을 더욱 강력하게 밝히고 그와 함께 홍낙안이 채제공을 두고서 일을 또 벌인다면 더 이상 놔둘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정조는 홍낙안이 상소로 올려도 충분한 일을 의도적으로 장서를 돌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음을 재차 언급해 채제공을 보호할 의사를 다시금 밝혔다. 특히 홍낙안을 두고 “조화(造化)의 권한이 어찌 이 무리들에게 놀림을
당하겠는가. 보검(寶劒)이 저기 있는데 그 갑(匣)은 비록 좀먹었다 하더라도 그 칼날은 있으니, 어찌 홍낙안의 머리에 시험할 수 없겠는가”라고 하여 홍낙안에 대한 노골적인 분노를 드러내는 언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1795년(정조 19) 8월에 정조는 홍낙안에게 끝내 벼슬길을 막는 것도 의리가 없는 짓이라고 하면서 급제(及第) 홍낙안에게 참하(參下)의 벼슬을 주되 먼 지방의 역참(驛站) 찰방(察訪)으로 임명해서 보내라고 하교하여 홍낙안을
소극적으로나마 배척하는 의사를 재차 천명했다.
홍낙안은 영남 출신의 남인으로서 서학에 몰두한 정약용 등의 기호남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장문과 통문 등을 돌려서 서학을 배척하고 서학을 신봉하는 정약용, 이승훈, 이가환 등을
비난하는 한편 그들의 후원자인 채제공을 비난하는데 앞장섰다. 이에 정조는 홍낙안이 서학을 배척하기보다는 당시 좌의정 채제공을 배척하는 데에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의심했고 진산사건 뒤에도 홍낙안을 음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끝내 홍낙안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 결과 홍낙안은 진산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로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을 비롯해 서학을 신봉하는 기호남인 계열과 갈등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