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환 李家煥

1742(영조 18)~1801(순조 1).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ㆍ정헌(貞軒),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이다. 이익(李瀷, 1681~1763, 호:星湖)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침(沈, 1671~1713), 아버지는 용휴(用休, 1708~1782, 호:惠寰), 어머니는 유헌장(柳憲章, 1658~1721)의 딸이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 호:樊巖)ㆍ이기양(李基讓, 1744~1802, 호:伏庵)ㆍ정약용과 더불어 남인(南人) 시파(時派)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정약용은 신유옥사(辛酉獄事)로 무고한 죽임을 당한 이가환을 애도하며 <정헌묘지명(貞軒墓誌銘)>을 지었다. 정약용은 이 묘지명에서 선배이자 스승인 이가환의 무고함을 적극적으로 변론했으며, 그의 뛰어난 암송 능력과 높은 학식을 칭송했다.

1771년(영조 47) 진사시에, 1777년(정조 1) 문과에 급제했고, 1780년 비인 현감(庇仁縣監)이 되었다.
1784년(정조 8) 생질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 호:蔓川)이 북경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이벽(李檗, 1754~1786, 호:曠菴)ㆍ권일신(權日身, 1742(1751)~1791, 호:稷庵) 등과 함께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일 때 서학(西學)을 접했다. 남인계의 지도자였던 이가환은 이들의 천주교 수용을 염려하여 이벽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그들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은 이가환이 이 일이 있은 후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으나,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 이후 배교했다고 했다. 이후 천주교를 반대하는 내용의 가사인 <경세가(警世歌)>를 지어 천주교의 성행을 경계했다. 1791년(정조 15)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부임하여 향교에 유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물리치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해 11월에는 천주교 신자 4~5명을 체포하고 다스린 후 석방하기도 했다.
1792년(정조 16)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가 서양의 과학과 문명에 밝은 이가환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자 노론(老論)은 이를 반대하며 공격적인 상소를 올렸고, 이 때문에 며칠 뒤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임명했다. 이후에도 노론이 남인계와 천주교와의 관계를 빌미로 계속하여 이가환을 공격하자, 정조는 1795년 그를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좌천했다. 이때 정약용은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 이승훈은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됐다. 이가환은 충주 목사 부임 당시에도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내세우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을 계속 배척했다.
1797년(정조 21) 4월에는 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으로, 12월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임명됐다. 이가환을 옹호하던 정조가 서거한 뒤인 1801년(순조 1) 정약용ㆍ이승훈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여섯 차례 국문을 받고 옥사했다.

이가환은 18세기에 서학, 특히 천문학ㆍ기하학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정조로부터 ‘진학사(眞學士)’라는 평을 받았다. 천주교인으로 몰려 정치적 공세를 당하자 천주교와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쟁 속에서 이승훈ㆍ정약용과 함께 천주교의 삼흉(三凶)으로 지목되어 희생되었다.

이가환의 묘는 현재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매산묘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