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철신 權哲身

1736(영조 12) ~ 1801(순조 1).
한국 천주교(→서학)의 초기 신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성호학파(星湖學派)에 속한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菴), 천주교 세례명은 암브로시오. 권일신(權日身, 1742(1751)~1791, 호:稷庵)의 형이며,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권암(權巖, ?~?)과 남양 홍씨(南陽 洪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주로 세거지인 양근에서 살았으며, 신유옥사 당시에 천주교 신자로 몰려 죽었다.
권철신은 성호학파의 거유로서 정약용이 학문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약용은 <녹암권철신묘지명>을 지어 권철신의 학덕을 기리면서 신유옥사 당시 억울하게 사학죄인으로 몰렸음을 주장하였다.

일찍부터 부친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24세 되던 1759년 이익(李瀷, 1681~1763, 호:星湖)의 문하에 출입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기호남인 계열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점차 성호학파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다. 그의 학문 세계에 영향을 준 인물로는 이병휴(李秉休, 1710~1776, 호:貞山), 이기양(李基讓, 1744~1802, 호:伏庵. → 복암이기양묘지명), 안정복(安鼎福, 1712~1791, 호:順庵), 윤동규(尹東奎, 1695~1773, 호:邵南), 신후담(愼後聃, 1702~1761, 호:河濱) 등을 들 수 있다. 이익과 이병휴 등이 사망한 뒤에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이 생겨났다. 당시 그의 문하에 들어간 인물로는 이총억(李寵億, 1764~?), 이존창(李存昌, 1752~1801, 세례명:루도비코 곤자가), 홍낙민(洪樂敏, 1751~1801) 등이 있었으며, 나중에 이승훈(李承薰, 1756~1801, 호:蔓川),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을 위시한 정약용 형제들, 이윤하(李潤夏, ?~?), 이벽(李檗, 1754~1786, 호:曠菴) 등도 그의 제자가 되었다.
권철신의 학문 세계는 유교 경전의 해석에서 탈주자학적 또는 자주적 사유를 표방하였다는 점, 그리고 리기론(理氣論)이나 심성론(心性論)보다는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같은 실천적인 도덕규범을 강조하는 경향을 띠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었다. 이것은 권철신의 학문 성향이 이익과 더불어 윤휴(尹鑴, 1617~1680, 호:白湖)의 학풍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권철신의 생애와 활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아무래도 서학의 기본 사상을 연구하면서 점차 천주교에 접근하게 된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권철신은 이병휴와 ≪대학(大學)≫에 관해서 문답을 주고받던 1773년까지는 양명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학 관계 서적들을 열독하면서 천주교를 신앙의 차원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1779년 겨울에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천진암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를 개최하고, 젊은 선비들과 함께 각종 유교 경서를 강독하면서 서학 서적도 탐구하였다. 이전에도 많은 남인 계열의 학자들이 북경에서 전래된 서학 서적들을 읽었지만 권철신이 주도한 주어사 강학회는 일종의 전환점이 되었다. 즉 이 강학회에 참석하였던 이벽과 그의 동료 학자들이 유교 경전을 좀 더 깊게 이해하자는 본래의 취지를 넘어서 천주교 신앙으로 경도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승훈과 이벽에 의해서 한국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던 해인 1784년 음력 9월 무렵에 이벽은 권철신을 찾아가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세례를 받을 것을 권하였다. 이에 권철신은 암브로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 뒤 한동안 천주교를 신앙으로 신봉하였으나 드러나게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아우였던 권일신이 1791년 진산사건의 여파로 체포되어 사망한 이후에는 더더욱 그러하였다. 하지만 대표적인 천주교 비판론자였던 안정복은 정약전, 이승훈, 이벽과 더불어 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貞軒)과 권철신도 천주교에 빠져 있다고 질책하였다.
그 후 천주교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권철신은 천주교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특히 1787년의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 이후로 남인 내에서 공서파(攻西派)와 신서파(信西派)가 노골적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권철신은 사학의 원흉들을 인도한 장본인으로 공격을 받았다. 마침내 1801년 신유옥사가 일어나자 조정에서 권철신의 죄도 물어야 한다는 논의가 비등하였다. 그리하여 3월 24일(음력 2월 11일) 양근에서 체포되어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세례명:아우구스티노) 등과 함께 문초를 당했다. 권철신은 국청에서 열린 추국에서 천주교를 신앙하지 않는다는 배교로 일관하였지만, 결국 4월 4일(음력 2월 22일) 매를 맞고 옥사하였다.

권철신은 성호학파의 거유로서 정약용이 학문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약용은 자신의 형 정약전과 함께 직접 권철신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또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당시에는 명례방의 김범우(金範禹, 1751~1787) 집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가 정약용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방면된 적도 있었다. 훗날 신유옥사 때 권철신은 옥중에서 매를 맞고 사망하였으며, 정약용은 둘째 형인 정약종의 진술에 따라서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았다는 판정이 내려져 사형을 면하고 유배형을 받았다. 나중에 정약용은 <녹암권철신묘지명>을 지어 권철신의 학덕을 기리면서 신유옥사 당시 억울하게 사학죄인으로 몰렸음을 주장하였다.

권철신의 천주교 신앙 여부는 불분명하다. 세례를 받은 초기에는 분명히 천주교의 신앙생활을 준수하였던 것 같으나, 조상제사를 거부하기 시작한 진산사건 이후에는 천주교에 회의적인 태도를 드러내었다고 여겨진다. 결국 유교의 부족한 부분을 천주교의 교리 내용으로 보완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 신앙으로서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권철신이 주도한 1779년 주어사 강학회의 성격에 관해서는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형편이다. 당대의 일반적인 유교 강학회 내지는 양명학 토론의 장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조선 후기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단초가 되었다고 평가하는 입장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