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보 洪和輔
1726년(영조 2)~1791년(정조 15).
정약용의 장인(丈人).
홍화보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字)는 경협(景協), 호(號)는 오창(梧牕)이다. 홍화보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ㆍ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홍화보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둘째 딸이 정약용과 혼인하면서 정약용의 장인이 되었다.
정약용은 15세가 되던 1776년 홍화보의 딸과 혼인하였다. 홍화보의 딸과 정약용 사이에 6남 3녀를 낳았으나 절반이 요절하여 살아남은 홍화보의 손자로는
학연(學淵 = 學稼, 1783~1859)ㆍ학유(學游 = 學圃, 1786~1855)ㆍ윤창모(尹昌謨 = 榮喜, 1795~1856)의 처가 있다.
정약용은 홍화보의 성격에 대하여 “호방하고 씩씩하며 의를 사랑하였다.”(≪혼돈록≫), “공은 기골이 가냘파서 마치 부인(婦人)과 같았으나, 용맹은 남보다 뛰어났으며, 타고난 성품이 호탕하여 권략(權略)과
웅담(雄談)을 좋아하였다.”(<함경북도병마절도사홍공묘갈명>)고 묘사하였다.
정약용은 홍화보가 평소에 병법(兵法)을 좋아하여 온갖 진법(陣法)을 익혀 주위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고 언급하였다. 홍화보는 36세의 나이로 무과로 출사하였으나 영조(英祖, 재위 1724.8~1776.3)의 총애를
받은 신하였다며 그와 관련하여 영조가 각궁(角弓)을 하사한 일화를 <홍절도사어사각궁기(洪節度御賜角弓記)>에 기록하였다. 영조가 내원(內苑)에서 홍화보에게 활쏘기를 명하였는데, 홍화보가 열 발을
쏘았으나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 영조는 홍화보의 활이 문제가 있다며 친히 자신의 활을 들어 1발을 쏘아 명중시키고는 홍화보에게 하사하였다. 정약용이 규장각(奎章閣)에서 활쏘기 시합 때마다 맞추지
못해 늘 벌을 받자, 홍화보는 소중히 간직해오던 하사받은 활을 사위에게 주었다. 정약용은 이 활로 몇 개씩 맞히어 상을 받게 되었다며 장인과 사위가 두 임금에 걸쳐 받은 은혜가 융숭하였다고 칭송하였다.
홍화보는 제갈량(諸葛亮, 181~234)의 팔진도(八陣圖)를 해석한 ≪오창팔진도해(梧牕八陣圖解)≫를 짓고 정약용에게 팔진도를 쓰면 학질(瘧疾)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정약용은 어린시절
이 말을 듣고 의문을 품었다고 술회하였다.
1780년(정조 5) 3월 19세의 정약용은 예천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한 부친 정재원(丁載遠, 1730~1792, 호:荷石)을 뵈러가던 중에 장인이 있는 진주(晉州)를 방문하였다. 정약용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홍화보는 정약용 내외를 반갑게 맞이하고 도착한 다음날 촉석루에서 잔치를 열었다.(<촉석루연유시서>) 홍화보는 논개(論介, ?~1593)를 기리는
의기사(義妓祠)를 수리하고 단청을 새롭게 칠한 후 이 일을 정약용에게 이 일을 기록하게 하였고,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진주성 촉석루(矗石樓) 위에 걸었다.(<진주의기사기>) 정약용은 진주를 총 3번
방문하였는데, 이때 처음 방문한 것으로 인연이 시작되었고 이후 촉석루와 진주 기생 등에 관한 여러 작품을 남겼다.
정약용은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한 지 5년쯤 되었을 무렵 사람들이 강진이 살 곳이 못된다는 말에 반박하는 근거로 홍화보가 북진(北鎭)의 경성(鏡城)에 다녀와서 한 말을 인용하였다. 1787년(정조 12) 홍화보는
북병사(北兵使: 함경도 경성의 북병영(北兵營)에 두었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임명되었는데, 홍화보가 이곳에서 돌아와서는 정약용에게 북진의 경성이 4월까지도 들판에 눈이 덮여 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이에 정약용은 “ 오곡이 어떻게 익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홍화보는 “여름이 호되게 뜨겁고 밤의 길이는 짧다.”고 대답하였다.
홍화보는 영조 대에 무과에 급제하여 승지에 오를 정도로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정조 대에는 홍국영(洪國榮, 1748~1781)과의 갈등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으나 황해도와 함경도 등 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정약용은 장인과 사위가 이어 국왕의 총애를 입은 것에 대해 자부심을 드러냈다. 정약용은 홍화보의 임지인 진주를 방문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고, 홍화보를 통해 함경도와 황해도 지역에 관한 지식을 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791년 황주(黃州)에서 사망하였다. 정약용이 만사(輓詞)와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