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상 丁夏祥
1795(정조 19) ~ 1839(순조 39).
조선 천주교의 대표적인 지도자.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세례명:아우구스티노)과 유조이(= 유소사(柳召史), 1761~1839, 세례명:체칠리아)의 아들이다.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신유옥사(辛酉獄事, 1801)로 침체된 조선 천주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헌신하였다. 1839년 기해옥사(己亥獄事)로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정하상의 아버지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 형이었다. 그러므로 정하상과 정약용은 조카와 삼촌(작은아버지)의 관계였다. 그러나 신유옥사로 정약용이 유배를 간 뒤에는 두 사람이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정하상 일가는 친척들로부터 천주학을 받아들여 집안을 망쳤다고 배척당했기 때문에 작은아버지 정약용도 이들과 연을 끊고 지냈을 것으로 보인다.
정하상은 1795년 경기도 양근(楊根)의 분원(分院)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신유옥사로 집안의 재산이 적몰(籍沒: 중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도 처벌하던 일)되었고 모친 유조이,
여동생 정정혜(丁情惠, 1778~1801, 세례명:엘리사벳)와 함께 선친의 고향인 마재에서 친척들의 핍박을 받으며 생활하였다.
성장한 뒤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신앙 생활을 지속하였다. 함경도 무산(茂山)으로 유배되어 살고 있던 조동섬(趙東暹, 1738~1830, 세례명:유스티노)을 찾아가서 천주교 교리와
한문을 배웠으며, 돌아와서는 천주교 신자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면서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였다.
1824년, 나이 29세 때 역관 출신 유진길(劉進吉, 1791~1839, 세례명:아우구스티노)을 만나서 함께 북경을 왕래하였다. 두 사람이 북경과 로마로 보낸 성직자 요청 서한이 발단이 되어서 1831년
조선 대목구(代牧區 = 代理監牧區: 교계제도(敎階制度)가 설정되지 않은 구역을 교황청에서 직접 관할하는 교구)가 설정되었다.
1836년, 모방(Pierre-Phillibert Maubant, 1803~1839, 한자명:羅伯多祿, 세례명:베드로) 신부를 조선으로 안내하였으며, 이어서 샤스탕(Chastan, 1804~1839, 한자명:鄭牙名伯, 세례명:야고보)
신부와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1796~1839, 한자명:范世亨, 세례명:라우렌티우스) 주교도 맞아 들였다.
1839년, 기해옥사가 터지자 체포되어 1839년 9월 22일 유진길과 함께 의금부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정하상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행적이 확인되어 1984년 5월 6일 시성(諡聖)되었다.
정하상이 남긴 ≪상재상서(上宰相書)≫는 대표적인 천주교 호교론(護敎論) 저술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