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李承薰

1756(영조 32) ~ 1801(순조 1).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본관은 평창(平昌). 세례명은 베드로.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1784년(정조 8) 초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한국인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 같은 해 겨울 이벽(李檗, 1754~1786, 호:曠菴), 권일신(權日身, 1742(1751)~1791, 호:稷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ㆍ정약용 형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이후 오랫동안 교회 지도층으로 활동하다가 1791년에 평택현감이 되었으나 곧 관직이 삭탈되었고, 1801년의 신유옥사(辛酉獄事) 때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이승훈과 정약용 형제는 매부처남 사이로, 일찍부터 이승훈은 정약전과 함께 권철신(權哲身, 1736~1801, 호:鹿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또 1784년 겨울에는 정씨 형제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했으며, 이듬해 봄에는 함께 모임을 갖다가 체포된 일이 있었고, 1787년 겨울에는 성균관 앞의 반촌(泮村)에서 정약용과 천주교 서적을 강습한 사실이 폭로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승훈과 정약용은 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貞軒)과 함께 ‘사학(邪學)의 3흉’으로 지목되어 천주교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반대파들의 공척 대상이 되었다.

이승훈의 아버지는 참판 이동욱(李東郁, 1739~?)이고, 어머니는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이가환의 누이이다. 서울 남대문 밖 반석방(盤石坊: 현 중림동 일대)에서 태어났으며, 장성한 뒤 나주 정씨(羅州丁氏)인 정재원(丁載遠, 1730~1792, 호:荷石)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정약용 형제와 처남매부 사이가 되었다.
이승훈은 일찍이 양근(楊根: 현 양평) 땅에 살던 권철신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학문을 닦다가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이를 전후로 그는 정약용 형제는 물론 이벽, 권철신의 아우인 권일신 등과 교분을 쌓으면서 서학서(西學書) 특히 수학서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1783년 12월 말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들어간 이승훈은 그곳 북당(北堂)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들을 만난 뒤,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J. Grammont, 梁棟材, 1736~?)으로부터 서양 수학과 함께 천주 교리를 배웠다. 그런 다음 1784년 2월경 그라몽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최초의 한국인 영세자가 되었고, 천주교 서적과 교회 물건들을 받아 조선에 전래하였다. 또 같은 해 겨울에는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ㆍ권일신ㆍ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다.
1785년 봄 이승훈과 이벽, 정씨 형제들은 명례방(明禮坊)에 거주하던 중인 출신의 김범우(金範禹, 1751~1787)의 집에서 모임을 갖다가 형조의 금리(禁吏)들에게 발각되었다. 이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일명 명례방사건)으로 이벽은 집안에 갇혀 지내다 사망하고,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훈은 정씨 형제들과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일반 신자들이 임의로 신부를 임명한 성직제도)를 수립하는 등 교회 재건에 노력하였다. 이어 1787년 겨울에는 정약용과 함께 반촌에서 천주교 서적을 강습했는데, 이 일이 동료들에 의해 폭로되면서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다(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
이승훈은 1790년에 음서로 의금부 도사에, 이듬해 평택현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791년의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제사 폐지 문제가 불거지면서 체포되었고, 평택현감 부임시 문묘에 배례하지 않았다는 불배성묘(不拜聖廟)의 죄목 아래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교회를 멀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숙부 이가환, 처남 정약용과 함께 ‘사학의 3흉’으로 지목되었다. 또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세례명:야고보)를 체포하려다 실패한 북산사건(北山事件) 때 다시 체포되어 충청도 예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 해배되었다. 동시에 이가환은 충주 목사로, 정약용은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일시 좌천되었다.
1801년 신유옥사가 일어나자마자 이승훈은 즉시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45세로 참수되었으며, 1856년(철종 7)에 아들 이신규(李身逵, 1793~1868)의 소청으로 대역죄만은 신원되었다. 문집으로 ≪만천유고(蔓川遺稿)≫가 남아 있지만, 그의 저서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빌린 편서로 추정되고 있다. 후손 중에는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李在誼, 1785~1868)가 1868년(고종 5)에, 증손 이연구(李蓮龜, ?~1871)ㆍ이균구(李筠龜, ?~1871)가 1871년에 천주교 신자로 죽임을 당했다.

이승훈은 한국 천주교회사는 물론 정약용 형제와 천주교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아울러 그의 정치ㆍ사상적 위치는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인물들이 천주교 즉 서학의 수용 과정에서 안정복(安鼎福, 1712~1791, 호:順庵)의 순암계(順菴系)와 권철신의 녹암계(鹿菴系)로 분기되는 과정과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 대의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도 필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해지는 유고가 없고, 관련 자료마저 소략하다.

이승훈의 묘는 아들 이신규ㆍ이택규(李宅逵, ?~?)의 묘와 함께 인천 반주골(현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산132-1)에 있었으나, 1981년에 발굴되어 천진암(天眞菴: 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천진암과 반주골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가 이어지고 있으며, 연례적인 추모 행사도 개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