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벽 李檗

1754(영조 30) ~ 1786(정조 10).
한국 천주교의 초기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정약용에게 학문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이다. 이벽의 누이가 정약용의 이복 형 정약현(丁若鉉, 1751~1821, 호:鬴淵)과 혼인했기 때문에 이벽은 정약용의 인척이었으며 학문적⋅인격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벽은 정약용과 그의 둘째형 정약전(丁若全, 1758~1816, 호:巽菴)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소개하였는데, <선중씨묘지명(先仲氏墓誌銘)>에서 정약용은 “1784년 4월 보름날 맏형수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와 이벽은 같은 배를 타고 물길을 따라 내려갔는데 배 안에서 천지가 조화하는 시초나 육신과 정신이 죽고 사는 이치를 듣고서 황홀하고 놀라워 마치 은하수가 끝없이 펼쳐진 느낌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정약용은 이벽의 재주와 인격을 소식(蘇軾, 1037~1101, 호:東坡)이나 이응(李膺, 110~169, 후한 말 명신)에 비교하기도 하였다. 또한 1814년 유배지 강진에서 ≪중용(中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저술한 ≪중용강의보≫를 탈고하면서 “광암이 지금까지 살았다면 그 진덕박학을 어찌 내게 비유하겠는가.”라며 이벽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여러 곳에서 그의 의견을 인용하거나 그의 해석을 따랐다. 1818년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이벽과 함께 학문을 닦던 시절을 자주 회상하였다.

이벽은 1754년(영조 30) 경기도 광주에 살던 기호남인 집안에서 이부만(李溥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선조 때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이정형(李廷馨,1549~1607)의 후손이었으나, 조부인 이달(?~?) 때부터 무반으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벽은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광주 마재의 정약현을 자형으로 맞은 뒤로 정약현의 아우인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가깝게 지내면서 유교 경전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벽은 21세 때인 1774년에 충청도 덕산으로 이병휴(李秉休, 1710~1776, 호:貞山)를 방문하여 스승으로 받들었고, 1776년을 전후해서는 이익(李翼, 1681~1763, 호:星湖)과 이병휴의 제자인 권철신(權哲身, 1736~1801, 호:鹿庵)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하였다. 한때 안정복(安鼎福, 1712~1791, 호:順庵)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 1779년 겨울 몇몇 인물들이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강학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벽은 주어사로 찾아가 그들과 합류하였다. 이때 이벽은 강학의 주제 가운데 하나로 서학서의 내용을 제기하였고, 그 결과 주어사 강학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 천주교 교리를 이해하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와 있다는 북경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된 이벽은 1783년 말에 이승훈(李承薰, 1756~1801, 호:蔓川)이 동지사 서장관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이승훈을 찾아간 이벽은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천주교 서적과 기도서를 얻어오고 영세도 받으라고 권고하였다. 그 결과 이승훈은 북경에 도착하는 즉시 북당을 방문하여 이듬해 봄에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들을 얻어 돌아왔다.
이승훈이 가져온 서적들을 연구한 이벽은 새로운 신앙의 가르침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으며, 자신이 터득한 천주교 교리를 주변 인물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에 정약전과 정약용 역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정약용은 정약전의 묘지명 말미에서 1784년 4월 15일에 큰 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이벽이 천주교 교리를 설파하는 것을 듣고 감동하여 서학 서적들을 빌려다 읽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결국 1784년 겨울,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 이승훈, 권일신(權日身, 1742(1751)~1791, 호:稷庵), 정약전, 정약용 형제 등이 모였다. 이승훈은 자신이 북경 선교사들에게서 배운 대로 동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집회를 주도하였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것을 교회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1785년 봄 우연히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曺摘發事件, 1785)의 여파로 이벽은 부친을 비롯하여 집안 식구들에게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다가 이벽은 1785년 여름 혹은 이듬해 봄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아직까지 이벽의 학문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된 바 없다. <성교요지>, <천주 공경가> 등이 이벽의 저술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정되지 않았다. 한편 이벽의 인척이자 학문적 동료였던 정약용의 저서에서는 이벽의 학문을 높이 평가한 내용들이 많이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