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유 丁學游

1786(정조 10) ~ 1855(철종 6).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의 둘째 아들.

아명은 학포(學圃)였으며 호는 운포(耘逋), 자는 치구(穉求)이다. 시문집은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저작으로는 ≪시명다식(詩名多識)≫과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가 있다.

정학유는 1786년(정조 10) 7월 29일 아버지 정약용과 어머니 풍산 홍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해는 정약용이 25세 때로 별시(別試)의 초시(初試)에 합격한 해이기도 하다. 정학유의 학문은 아버지 정약용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정약용은 정학연(丁學淵, 1783~1859), 정학유 두 아들에게 자주 올바른 학문과 처신을 강조하였다. 정학유가 자신의 가벼운 성격을 고치고자 처소의 이름을 ‘경기재(敬己齋)’라고 짓자 이에 정약용은 <경기재잠(敬己齋箴)>을 지어주어 독려하였다. 또한 정약용은 정학유가 닭을 기르자, 그에게 양계(養鷄) 방법을 연구하여 ≪계경(鷄經)≫을 지어볼 것을 권유하였다. 이러한 일화는 새로운 실용적 학문 영역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정약용은 정학유에게 경학 등의 학문에 힘쓸 것을 자주 독려하였다. 정약용은 ≪주역사전(周易四箋)≫, <제무진본(題戊辰本)>에서 1808년(戊辰)에 이 책을 완성하는 데 정학유의 도움을 받았음을 기록하였으며, ≪주역사전≫에는 정학연과 정학유의 의견이 간간이 실려있다.

정학유는 정약용의 벗이었던 청송 심씨 심욱(沈澳, ?~?)의 딸과 1800년(정조 24)에 혼인하였다. 하지만 정학유의 처 심씨는 1816년(순조 16) 8월에 죽었고 ≪다산시문집≫에는 정약용이 지은 심씨의 묘지명[<孝婦沈氏墓誌銘>]이 있다. 정학유는 이후 남양 홍씨 홍발(洪鏺, ?~?)의 딸과 혼인하였다. 정학유는 형 정학연과 더불어 현재 “다산학단(茶山學團)”이라고 불리는 정약용의 제자 집단에 속하여 정약용으로부터 많은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정학유는 1845년(헌종 11) 형 정학연과 더불어 정약용의 제자인 황상(黃裳, 1788~1863, 호:巵園)과 ≪정황계첩(丁黃契帖)≫을 엮어 두 집안이 대대로 우의를 지속하기를 다짐하며 계를 맺고 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 대한 정학유의 관심은 그의 저작 ≪시명다식≫과 ≪농가월령가≫를 통해서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시명다식≫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사물들을 풀, 곡식, 나무, 채소, 새, 짐승, 곤충, 물고기의 총 여덟 개의 범주로 설명한 것으로서 ≪시경≫을 독해하는 데 있어 유익한 참고서가 될 수 있는 문헌이다. 이 책은 총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형 정학연이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시명다식≫이 지어진 계기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정학유는 ≪금경(禽經)≫, ≪채보(菜譜)≫, ≪이아(爾雅)≫, ≪본초(本草)≫ 등을 서로 참조하여 이 책을 지었다고 기술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사물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농가월령가≫에서도 그의 학문적 관심사가 잘 드러나 있다. 정학유는 농민들의 일상과 농사일을 이 책에서 상세히 묘사하였다. 농민들이 각 절기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행동강령을 제시하였으며 농업이 갖는 중요성을 농민들에게 각인시켰다.

양계와 관련된 일화, ≪시명다식≫, ≪농가월령가≫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정학유의 학문이 구체적인 사물 자체를 탐구하는 데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농업과 긴밀한 관련성을 가졌음을 보게 된다. 닭을 직접 길러보거나 ≪시경≫에 등장하는 사물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찾아보고자 한 일, ≪농가월령가≫를 통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제시하고 가르치고자 한 일은 정학유가 지향한 학문의 정신과 방향성을 잘 보여준다.

정학유의 묘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南楊州市) 화도읍(和道邑) 금남리(琴南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