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학연 丁學淵
1783(정조 7) ~ 1859(철종 10).
문학과 의술에 뛰어났으며, 정약용의 장남으로 다산학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정학연의 자는 치수(穉修), 호는 유산(酉山)으로 정약용과 풍산 홍씨(豊山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ㆍ장년기에 부친이 18년간 유배되어 집안에 풍파가 닥쳤다.
유배지로 부친을 세 차례 이상 방문하여 시종하였고, 인척인 이학규(李學逵, 1770~1835, 호:洛下生)ㆍ권영좌(權永佐, ?~?, 호:米山)ㆍ남상교(南尙敎, 1783~1866, 호:雨村)
등 남인 및 소북계의 유명한 시인들과 교분이 있었을 뿐 아니라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秋史ㆍ阮堂)ㆍ박제가(朴齊家, 1750~1805, 호:楚亭)의
아들인 박장암(朴長馣, ?~?)ㆍ신위(申緯, 1769~1845, 호:紫霞)ㆍ유최관(柳最寬, ?~?, 호:貞碧) 등 추사(秋史) 계열의 인물들, 홍길주(洪吉周, 1786~1841) 형제 및
서유구(徐有榘, 1764~1845, 호:楓石) 명가 집안 인물들, 이만용(李晩用, 1792~?, 호:東樊)ㆍ최헌수(崔憲秀, 호:愚山)ㆍ황상(黃裳, 1788~1863, 호:巵園)ㆍ의순(意恂, 1786~1866, 호:草衣ㆍ艸衣) 등 미미한
신분의 시인들과 두루 교제를 가졌다. 특히 정학연과 김정희가 일찍부터 친밀한 교제를 하였음은 아직 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김정희의 ≪담연재서장(覃硏齋書狀)≫(필사본 1책, 개인소장)에는 김정희가 정학연에게 보낸 이른 시기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문학ㆍ학문ㆍ의술로 이름이 명성이 자자했음에도 벼슬은 만년인 1857년에 잠시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지냈을 뿐이고, 수많은 시와 저술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산견되고 있다.
정약용의 장남으로 차남 정학유(丁學游, 1786~1855), 매제 윤영희(尹榮喜, 1795~1856)와 더불어 정약용을 성실히 시종하였다. 정학연은 1802년ㆍ1805년,ㆍ1811년 부친의 배소(配所)를 찾았던 것이 확인된다.
특히 1805년에는 보은산방(寶恩山房)에서 부친과 ≪주역(周易)≫ 및 ≪예기(禮記)≫를 문답하였다. 1815년에는 상경한 의순을 맞이하였고, 1818년 부친이 해배되면서 결성한 ‘다신계(茶信契)’의 일원으로
줄곧 강진(康津)의 인사들과 왕래하였다. 1822~23년에는 상경한 윤종영(尹鍾英, 1792~1849)ㆍ윤종삼(尹鍾參, 1798~1878)ㆍ윤종진(尹鍾軫, 1803~1879) 등을 맞이하였다. 1823년에는
아들 정대림(丁大林, 1807~?)의 혼사를 위해 정약용과 함께 춘천행에 올랐다. 1836년과 1849년에는 강진에서 상경한 황상을 맞이하는 등 한평생 정약용의 곁에서, 또 정약용의 제자들과 교분을 유지하였다.
부친의 유배 이전에는 한양 명례방(明禮坊) 집에 주로 거하면서 남인계의 선배ㆍ동기들과 시주(詩酒)로 교제하고, 학문을 연마하였다. 부친의 유배기에는 배소를 오가는 것 외에는
마재 향저에서 주로 기거하면서 시와 학문을 하였다. 문학 관련 활동으로는 아우 정학유의 ≪시명다식(詩名多識)≫에 서문을 쓰고, 윤종벽의 ≪취록당유고(醉綠錄堂遺稿)≫에
서문을 썼으며, 생질 윤정기(尹廷琦, 1814~1879, 호:舫山)의 ≪홍엽전성집(紅葉傳聲集)≫에 비평을 하였다. 만년에는 의순의 ≪일지암시고(一枝庵詩稿)≫와 황상의 ≪치원소고(巵園小藁)≫를 직접 편차, 비평하기도 하였다.
본인의 저술로는 1805년 강진을 방문하여 지은 ≪유두륜산기(遊頭輪山記)≫(필사본 1책, 일본 개인소장)와 농업ㆍ축산 관련 서적인 ≪종축회통(種畜會通)≫(필사본 8권3책, 일본 개인소장)이 있으며,
그 외는 전부 시집들로 여러 책에 산재해 있다. 1만여 수에 가까운 다작을 남겼다는 정학연의 시는 제대로 모이지 않고 흩어져 있다. 그의 시가 수록된 시집들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삼창관집(三倉館集)≫(필사본 1책, 일본 宮內廳 書陵部 소장, 1802~1808년작, 169제 245수)ㆍ≪선음(鮮音)≫(필사본 1책,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ㆍ≪순리어필집(蒓里魚疋集)≫(필사본 1책, 고려대 소장)ㆍ≪근체시선(近體詩選)≫(필사본 1책, 고려대 소장)ㆍ≪다산시령(茶山詩零)≫(필사본 1책, 고려대 소장)ㆍ
≪근고시선(近古詩選)≫(필사본 1책, 동국대 소장)ㆍ≪유산시(酉山詩)≫(필사본 1책, 실학박물관 소장, 1829년 전후작, 56제 136수)ㆍ≪무제≫(필사본 1책, 개인소장, 74제 156수)ㆍ
≪사가시(四家詩)≫(필사본 1책, 개인소장)ㆍ≪유서첩(柳絮帖)≫(필사본 1책, 개인소장)ㆍ≪유산시첩(酉山詩帖)≫(필사본 1책, 개인소장)ㆍ≪수종사유첩(水鍾寺遊帖)≫(필사본 1책, 개인소장)ㆍ
≪유산(酉山)≫(필사본 1책, 통문관 구장)ㆍ≪유산운포동번창화시첩(酉山耘逋東樊唱和詩帖)≫(필사본 1책, 개인소장)ㆍ≪오로첩(五老帖)≫(필사본 1책, 개인소장, 1846년작) 등이다.
정학연은 의술로도 명성이 자자하여 궁중에까지 부름을 받았던 일화가 전한다.
정학연은 부친 정약용의 학문과 문학을 충실히 전수받은 다산학단(茶山學團)의 핵심 인물이다. 30대 초반부터 시와 의술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김정희ㆍ신위ㆍ서유구ㆍ홍길주 등 당대 시단에서 쟁쟁한 인물들과
폭넓은 교유를 하여 부친의 해배 후 다산학단 구성원들과 서울 근기 지역 문사들과의 문학 및 학술 교류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 초부면 조동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