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종 丁若鍾

1760(영조 36) ~ 1801(순조 1).
1801년 신유옥사 때의 순교자, 초대 명도회(明道會)의 회장, 최초의 한글
기독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의 저자.

정약종은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며 1760년 경기도 광주의 마현(지금의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바로 위의 형인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에게 천주교를 배워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 호:蔓川)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형제인 정약용ㆍ정약전과 함께 신앙 활동을 했으며, 정약용이 이승훈ㆍ강이원(姜履元, ?~?) 등과 함께 반촌(지금의 혜화동)에서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다가 발각된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 이후 부친이 천주교를 심하게 금지하자 정약용과 정약전은 배교하였지만 그만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정약용은 정약종에 대해 1801년(순조 1) 신유옥사 때 신문을 받으면서 진술한 것 외에는 아무런 언급도 남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정재원(丁載遠, 1730~1792, 호:荷石)이며,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尹持忠, 1759~1791, 자:禹用)의 고모이다. 같은 남인인 이수정(李秀廷, ?~?)의 딸과 혼인했다. 권철신(權哲身, 1736~1801, 호:鹿庵)과 이가환(李家煥, 1742~1801, 호:貞軒)을 통해 성호학파의 실학을 계승했고, 한때 불로장생을 위해 도교의 천지개벽설을 신봉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786년(정조 10) 3월(음력 : 이하 같음) 정약전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곧 권일신(權日身, 1742(1751)~1791, 호:稷庵)을 대부로 삼아 이승훈에게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받았다.
이후 오로지 교리를 연구하고 실천해 나가는 데만 열중했다. 1787년 정미반회사건 이후 부친이 천주교를 심하게 금지하고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이 모친의 장례 때 천주교 교리에 따라 신주를 불태운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나라에서 천주교를 엄히 금지하여 형과 동생을 비롯하여 많은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났으나 그는 끝내 천주교를 굳게 믿었다.
1792년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양근 분원(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해 인근 지역의 신자들과 자주 왕래하면서 하층민 신자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교리를 가르쳐 주었으며, 1794년 무렵부터는 서울의 지도층 신자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교회지도자로도 활동했다. 교리에 가장 밝다는 평을 듣던 그는 1799년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세례명:야고보) 신부가 창설한 교리연구 및 전교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초대회장으로 임명되어 교회의 교리교육과 선교활동의 실무를 총괄했다.

1797년 이후에 민중들을 위해 한글로 된 ≪주교요지≫를 저술했는데, 주문모 신부는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이 책을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마이야(J. de Mailla)가 쓴 ≪성세추요(盛世芻蕘)≫보다도 우수한 교리서라고 칭찬했다. 또 천주교의 교리를 한데 모은 ≪성교전서(聖敎全書)≫도 편찬했으나 박해로 마치지 못했다.
대왕대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와 노론 벽파가 정적을 천주교 신자로 몰아 제거하고자 1801년 1월 10일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단행함에 따라 그도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1월 11일 체포되어 신문을 받았다. 모진 고문에도 교회에 불리한 진술을 일체 거부한 그는 올바른 학문인 천주교를 믿은 죄로 만 번 죽임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한 뒤 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그의 장남 정철상(丁哲祥, ?~1801, 세례명:가롤로)도 신앙을 증거하고 4월 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했다. 이때 죽임을 면한 그의 둘째 부인 유조이(= 유소사(柳召史), 1761~1839, 세례명:체칠리아)와 차남 정하상(丁夏祥, 1795~1839, 세례명:바오로)과 딸 정정혜(丁情惠, 1797~1839, 세례명:엘리사벳)는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민중들을 위해 그가 저술한 최초의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는 박해기 내내 필사되어 영적인 양식으로 널리 읽혔고, 그가 회장을 맡은 명도회의 활동도 교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가족들인 유조이ㆍ정하상ㆍ정정혜가 1984년 이미 시성되었으므로 그와 장남 정철상까지 시성되면 일가족 5명이 성인품에 오르는 큰 영광을 누렸다.

2002년 1월 문화관광부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고, 현재 진행 중인 시복시성(諡福諡聖)1) 대상자로 정철상과 함께 선정되어 시복시성 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묘는 현재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