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전 丁若銓

1758(영조 34) ~ 1816(순조 16).
정약용의 둘째 형으로 19세기 해양 박물학 서적인 ≪현산어보(玆山魚譜)≫의 저자.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菴)이다. 1758년 광주(廣州) 마현(馬峴)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의 둘째 형으로서 동복 형제 중에서는 제일 큰 형이다. 정약용은 자신의 제자인 이청(李𤲟 = 李鶴來, 1792~1861, 호:靑田)을 시켜서 형의 저술인 ≪현산어보≫를 보완ㆍ완성시킬 정도로 형의 저술과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유배 중에도 서로 서신을 교환하면서 학문 교류를 지속하였다.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낸 정시윤(丁時潤 1646~1713)의 5대손으로 진주목사(晋州牧使) 재원(載遠, 1730~1792, 호:荷石)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부친의 두 번째 부인인 윤씨로서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의 손녀이다. 큰 형은 정약현(丁若鉉, 1751~1821, 호:鬴淵)이고 동복의 두 동생은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세례명:아우구스티노)과 약용(若鏞)이며 누이는 이승훈(李承薰, 1756~1801, 호:蔓川)의 아내가 되었다.
1776년(영조 52)에 호조좌랑이 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오게 되었는데 이때 이윤하(李潤夏, ?~?), 이승훈, 김원성(金源星, ?~?)과 교유하기 시작했고 이익(李瀷, 1681~1763, 호:星湖)의 학문을 이어받은 권철신(權哲身, 1736~1801, 호:鹿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79년(정조 3)부터 몇 년간 지속된 천진암, 주어사의 강학회에 참석하여 권상학(權相學, ?~?), 이총억(李寵億, ?~?), 이벽(李檗, 1754~1786, 호:曠菴) 등과 강학하였는데 이 와중에서 사돈집 사람인 이벽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가 소개한 서학서인 ≪기하원본(幾何原本)≫을 접한 동시에 천주교의 교리를 들었는데, 결국 1783년(정조 7) 가을에 진사가 된 후 그 이듬해에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는 동시에 후에 조선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된 최창현(崔昌顯, 1754~1801)의 대부가 되었다. 동생인 약종을 천주교에 인도한 것도, 외종인 윤지충(尹持忠, 1759-1791, 자:禹用)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친 것도 정약전이었다.
초기 천주교회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정약전이 천주교와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1787년(정조 11) 이승훈, 강이원(姜履元, ?~?), 정약용이 함께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다가 이기경(李基慶, 1756~1819)에게 발각된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 1787) 이후부터로 보인다. 이 사건 이후 재능 있는 자식들의 앞길을 걱정하여 천주교를 떠날 것을 요구한 아버지의 강압으로 천주교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주교와의 인연을 완전히 단절한 것은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난 1791년으로 여겨진다.
1790년(정조 14) 여름에 원자(元子)가 태어나 시행한 증광별시에 급제하였고 곧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임명되었다. 당시의 조정은 채제공(蔡濟恭, 1720~1799, 호:樊巖)의 등용 이후 청남계열의 인물들이 일정하게 탕평정국에 참여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정약전은 자신보다 앞서서 관직생활을 하던 동생 정약용과 함께 정조(正祖, 재위 1776.3~1800.6)의 후의를 많이 입으면서 비교적 순탄한 행보를 밟았다. 이런 이유로 1795년(정조 19) 박장설(朴長卨, 1729~?)이 정약전의 지난날 과거답안이 서양의 사행설(四行說)을 취한 것이라고 비판하였음에도 정조가 답안을 친히 검토하고는 정약전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1797년(정조 21)에는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서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왕명으로 한치응(韓致應, 1760~1824) 등과 함께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편찬에 참여하였다.

≪현산어보≫ 하지만 1800년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수렴청정을 담당한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와 노론 벽파계열의 인물이 일거에 정국을 장악하면서 정약전을 비롯한 남인계열의 인물들은 천주교와의 연루가 문제가 되어 정계에서 축출되고 결국 정약전은 이듬해인 1801년(순조 1) 2월 28일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11월 2일에는 조카사위인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백서사건으로 재압송되어 재차 국문 당하였고 이후 흑산도로 유배지가 변경되어 죽는 날까지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였다. 유배 초기에는 당시 내흑산(內黑山)으로 불리던 우이도(牛耳島)에서 지내다가 흑산도로 옮겼고 말년에 정약용이 해배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시 우이도로 나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현산어보(혹은 자산어보)≫를 비롯하여 우리가 정약전의 사상과 학문을 이해할 때 꼭 검토하는 저술들은 모두 유배시절에 이룩된 것들이다. 그는 유배지에 사촌서실(沙村書室)이라는 서당을 짓는 등 현지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정리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현산어보≫를 비롯한 그의 저술 속에는 현지인들과의 긴밀한 교류와 협력이 없었다면 나오기 어려운 내용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산어보≫는 기존의 단편적인 어류 관련 기록들과는 달리 해양 생물의 체계적인 분류를 시도했을 뿐 아니라 해충과 같이 기존의 저술에서는 언급되지 않았던 내용까지 모두 아우른 19세기 최고의 해양 박물학 저술로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저작도 많지 않고 저술의 분량도 풍부하지 않아 그의 사상에 대한 깊은 연구에는 많은 한계가 있는 실정이며 장래가 촉망되던 그의 아들 정학초(丁學樵, 1791~1807) 역시 1807년에 요절함으로써 그의 학문적인 계승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저술로는 ≪현산어보≫ 이외에도 애민적(愛民的) 차원에서 소나무 정책의 문제점과 그 대안을 제시한 ≪송정사의(松政私議)≫, 흑산도 어민 문순득(文淳得, 1777~1847)의 표류담을 기술한 ≪표해록(漂海錄)≫이 전해지고 있다.

비록 진산사건 이후 천주교를 떠났지만 초기 천주교회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근기남인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면서, 채제공 계열에 속하였던 탓에 채제공이 정승으로 재직하던 시기에는 동생인 정약용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중용되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가 흑산도에 유배되었을 때 자신의 관찰 및 섬 사람들의 지식과 경험을 아울러서 저술한 ≪현산어보≫는 그 이전에 존재하였던 여러 해양 생물 관련 서적을 내용적으로나 체제상으로 능가하였기 때문에 19세기 조선의 해양 박물학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서 그 위상을 인정할 수 있다.

그의 묘소는 원래는 충북 충주시 금가면의 나주 정씨 선영에 있었는데 현재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 뒤편의 앵자산 기슭으로 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