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현 丁若鉉

1751(영조 27) ~ 1821(순조 21).
정약용의 큰형.

자는 태현(太玄), 호는 부연(鬴淵). 1751년 경기도 광주(廣州) 마현(馬峴)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의 큰 형으로서 정약용이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살아있었기에 말년에 두 형제만은 재회할 수 있었다. 당시 천주교의 중심인물이었던 이벽(李檗, 1754~1786, 호:曠菴)의 매부였으며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의 장인이기도 했다.

정재원(丁載遠, 1730~1792, 호:荷石)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의령 남씨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이다. 의령 남씨는 처사 남하덕(南夏德, ?~?)의 딸이다. 계모(繼母)였던 해남 윤씨(海南尹氏, ?~1770) 소생의 세 동생이 정약전(丁若銓, 1758~1816, 호:巽菴),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세례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丁若鏞)이며, 누이는 이승훈(李承薰, 1756~1801, 호:蔓川)의 아내가 되었다. 1751년에 마현에서 태어났지만 이듬해 생모가 죽자 유모를 따라서 외가에서 수년간 자랐다. 1795년(정조 19), 45세에 이르러서야 진사시에 합격을 하였기 때문에 동생들과는 달리 관직생활을 영위하지는 못하고 장자로서 집안을 지키는 데 주력하였다. 세 동생들과는 달리 천주교와 직접 관련되지 않았지만 이벽이 처남이었다는 점, 그리고 큰사위가 황사영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전혀 무관하였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1801년, 신유옥사(辛酉獄事) 시기에 사위인 황사영과 동생인 정약종을 잃고 딸과 정약전, 정약용은 모두 유배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딸은 훗날 끝내 유배지인 제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1821년 가을에 역질(疫疾)로 사망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경주 이씨로서 이벽의 누이동생이었으며, 두 번째 부인은 의성 김씨였다. 시고(詩稿) 3권을 남겼다.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을 통해서 정약용을 포함한 동생들이 서학을 접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정약현은 나주 정씨 가문이 천주교를 접하는 주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南陽州市) 조안면(鳥安面)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