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원 丁載遠

1730(영조 6) ~ 1792(정조 16).
정약용의 아버지.

본관은 압해(押海, 현재의 羅州에 속함). 초명은 재문(載文)이며 자는 기백(器伯), 자호(自號)는 하석(荷石)이다. 1730년 6월 10일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792년 4월 9일 진주 관아에서 별세하였다.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울산부사, 진주목사 등을 지냈으며 아버지로서 정약용 형제의 성격 형성과 학문의 방향 설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약용의 부친으로 정약용의 성장기의 인격과 학문의 기초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약용의 <선인유사(先人遺事)>에 의하면 정약용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거동을 보면서 삶의 자세를 확립해 나갔는데 몇몇 일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재원은 고을 수령(守令)으로 재임할 때 궁핍한 친족이나 친구를 후하게 맞이하였고 그들을 모욕하거나 멸시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정약용에게 “가난한 친구를 대하는 방법은 가장 좋은 것이 겉과 속이 모두 기뻐함이고, 그 다음이 겉과 속이 모두 담담함이며, 가장 나쁜 것이 마음 속으로 싫어하면서 겉으로 기쁜 체하는 것이다.” 하고, “마음으로 싫을 때는 반성하며 자신의 심기를 화락하게 하여 기쁜 모습을 드러냄도 가장 좋은 방법과 같다.”고 하였다.
정재원은 벗과 학문을 이야기할 때는 풍채가 빛나고 좌우로 응수하며 화락한 빛을 띠었으나, 남의 흠을 들추는 자리에서는 깊이 잠들어버렸다. 이렇게 정재원은 평생 남의 은밀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들은 것을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정재원은 ‘나중에라도 기억하면 남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을 테지만 자기에게는 참으로 마음에 남은 것이 없다’ 고 하였다. 정약용은 부친을 칭송하여 ‘성덕군자(盛德君子)가 아니고서는 이와 같을 수 없다’ 고 하였다.
정재원은 한광부(韓光傅, ?~?)와 친밀하여 이들의 관계를 ‘단금지교(斷金之交)' 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그에게 “나와 자네가 지금부터 친구로서 경선(景善, 한광부의 자)처럼 할 수 있겠는가?” 하니 그는 정색하며“사람의 사귐이란 자연스럽게 친해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것인데 어떻게 날을 정해 뜻을 세워 사귀겠는가?”라고 하였다. 정재원은 한성부서윤으로 재임할 때 윤대관(輪對官)으로 입시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주대(奏對)가 상세하고 분명하며 거동이 단아하므로 영조(英祖, 재위 1724.8~1776.3)는 시신(侍臣)에게 “내가 보기에 정재원은 진실로 재상의 그릇이다. 반시(泮試)를 보게 하여 합격하면 곧 등용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이 응시할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많은 나이를 핑계로 거절하였다. 덧붙여 작은 고을 원 자리나 얻어 생계를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백성을 돌보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면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일찍이 채제공(蔡濟恭, 1720~1799, 호:樊巖)이 번리(樊里)에 물러가 있을 때 문인과 친척이 대부분 소원해졌으나 정재원만은 여러 번 그를 방문하였고 마침내 혼인까지 맺었다. 채제공이 정승이 되자 정재원도 관직에 나가 서울에서 가까이 살았으나 체재공의 집에 드나들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신년 인사만을 하러 들렀는데, 그 때에도 반드시 예를 갖추어 도포와 가죽신을 착용하고 만남을 청하는 명함을 들인 후 헐숙소(歇宿所)에서 기다리다 문지기가 알린 다음에야 들어갔다고 한다. 그는 “정승의 집은 개인 집이 아닌데, 평소에 보면 어떤 이는 가죽신을 신지 않고 명함을 가져가지 않고도 출입할 수 있음을 자랑으로 삼으니 사람을 민망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 일화는 채제공이 쓴 정재원의 <묘갈명(墓碣銘)>에서도 확인된다.
정재원의 이와 같은 자세가 아들인 약현(若鉉, 1751~1821, 호:鬴淵)ㆍ약전(若銓, 1758~1816, 호:巽菴)ㆍ약종(若鍾, 1760~1801, 세례명:아우구스티노)ㆍ약용(若鏞) 형제에게 올곧은 선비의 자세를 체득케 하는 데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타협하지 않는 선비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 선비와 학자로서 올곧은 삶을 살 수 있게 하였다.

그의 묘소는 처음에는 충주 가차산면(加次山面: 현재 금가면(金加面)) 하담(荷潭)의 선영에 모셨고 묘지문(墓誌文)은 채제공이 지었다. 현재 정재원 부부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천진암(天眞菴) 뒤편 앵자산의 천주교 성인 가족 묘원으로 옮겨져 있다.